배역(配役) ; 별을 따서 가슴에 심어놔야 별을 이해할 수 있어
인생이란 무대에서 자신의 배역配役을 깨달은 사람은 행복하다. 그 배역이 곧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연극에서 ‘하인’ 역할을 맡았다면, 나는 얼굴에 씌운 가면假面이나 겉모습만 ‘하인’인척으로는 부족하다. 나의 목소리, 나의 걸음걸이, 나의 몸가짐, 그리고 내 생각을, 내가 참여한 연극의 성공을 위해 ‘철저하게’ 하인이 되어야한다. 영국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나의 왼발>My left foot(1889)이라는 영화에서 뇌성마비 질환을 앓고 있는 아일랜드 작가이자 화가인 크리스티 브라운 역할을 맡았다. 그는 이 배역에 온전히 몰입하기 위해 소위 ‘메소드 연기’ 기술을 습득하고 실천하였다. 루이스는 브라운 척하지 않고 브라운이었다. 그는 거의 일 년 동안 휠체어에서 떠나지 않았다. 직접 발을 이용하여 식사, 글씨, 바느질을 연습하였다.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촬영 후 동네 레스토랑에 갈 때도 휠체어를 탔고 촬영장으로 가기 위해 누군가에 의해 휠체어에 탄 자신이 옮겨져야 했다. 자신이 맡은 배역이 되어 자신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드러낼 때, ‘액터’actor, 즉 ‘배우’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그리스 비극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비극은 연습에 대한 재현이다. 그것은 단호하고, 목적과 수단이 하나가 되는 그것 자체이고, 압도적이다.” 인생이란 무대에 올라온 나라는 존재는 연습練習이다. 연습을 시도하는 배우는 먼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무엇인지 깨달아야한다. ‘신하’ 역할을 맡았는데, ‘왕’ 역할을 탐하여 연기한다던지, 혹은 ‘왕’ 배역을 맡은 자가 ‘신하’처럼 연기한다면, 그는 관객과 자신에게 초라해 보이고 안쓰럽다. 신명이 날 리가 없다. 자신이 해야 할 배역을 아는 사람은 그것이 되기 위해 연습한다. 연습은 자신이 간절하게 원하는 그것을 온몸과 정신에 익히는 작업이다. 연습은 저 밤하늘의 별을 따서 자신의 가슴에 심어놓는 작업이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별이 되지 않는다면, 그는 별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이 진화하면서, 오래전에 뇌에 장착한 ‘거울신경계’mirror neuron를 통해, 내가 그것을 지향할 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가 된다.
하루란 그것 자체가 되기 위한 연습이다. 지금-여기는 그것을 재현하기 위한 마당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mimesis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설명한다. 플라톤은 이 단어를 폄하하였다. 그는 철학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비겁한 방법을 사용한다. 철학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예술이나 문학이 추구하는 ‘그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소위 철학을 ‘부정적으로 정의’하였다. 후에 그리스도교가 자기 정체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단’이란 개념을 사용한 전략과 같다. 여기서 그것이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그림, 음악, 혹은 글로 표현하려는 시도다. 그는 ‘미메시스’를 ‘흉내’imitation란 의미로 사용하였다. 아름다운 꽃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시로 표현하는 예술가나 시인은, 그것 자체를 표현할 수 없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달랐다. 그는 ‘미메시스’를 흉내가 아닌 재현再現representation으로 설명한다. 재현이란, 지금 당장, 여기서 나의 연습을 통해, 완벽한 형태로, 심지어는 원형보다 더 감동적으로 드러나는 현현顯現이다. 아무도 몰랐던 아일랜드 화가 크리스티 브라운이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를 통해 눈부시게 부활하였다.
‘연습’이란 연습이 아니라 실전實戰이며, 그것은 재현이다. 그(녀)는 스스로 원하는 그것 자체가 되어야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언행은 ‘단호斷乎’하다. 자신이 되고자하는 그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한다. 자신 스스로 평상시에 그런 습관을 들이지 않는다면, 그의 일상은 겸연慊然쩍다. 단호한 사람은 오랜 묵상과 명상을 통해, 자신의 미래상을 상상하고 그것이 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을 짠 사람만이 취할 수 있는 태도다. 그런 준비 없이 단호한 자는 어리석다. 훈련하지 않고 올림픽경기에 참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의 언행은 언제나 목적과 수단이 하나가 된 ‘그것 자체’다. 그는 하루를 연습 삼아 설렁설렁 보내지 않는다. 그는 늦장을 부리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온전히 몰입한다. 그러기에 그의 언행은 압도적이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신만의 삶의 문법을 소유한 자다.
기원전 3세기에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랍비 안티고노스Antigonos가 탈무드 <선조들의 어록>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대가를 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주인을 섬기는 종처럼 행동하지 말라.
대가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을 것처럼 주인을 섬기는 종처럼 행동하여라.
하늘에 대한 경외로 일상을 보내라.”
탈무드 <선조들의 어록> I장3행
사람들에게 “특정 종교를 왜 믿으십니까”라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천국이나 극락에 가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내가 생전에 이만큼 했으니, 사후에 그만큼 보상을 받겠다는 이기심이다. 신을 내 마음대로 조정하겠다는 거만이다. 내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대가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자신에게 의미가 있고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안티코네에 중요한 삶의 원칙은 ‘하늘에 대한 경외’이다. 나는 하늘이 점지해 준 나의 고유임무를 수행할 뿐이다.
<바가바그기타>에서 유사한 구절이 등장한다. 이 노래 6장 첫행에서 크리슈나는 자신의 이기심을 공격하고 해탈에 도달하기 위한 요가를 수련하는 아르주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가수련의 진정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행위를 하는 사람은 그 행위의 열매에 의존하지 않고, 그것을 의무라고 여겨야한다.
그는 그 열매를 하찮게 여겨 버릴 수 있는 자이며, 그는 요가수련자다.
그는 구별된 불 없이, 구별된 의례 없이 행동하는 자가 아니다.”
<바가바드기타> 6장1행
숭고한 자신을 위해 오늘이란 시간을 연습하는 자는, 자신행위의 열매karma-phalaṁ를 기대하고 의존하는 자가 아니다. 만일 그 결과에 연연해한다면, 그 과정이 결과를 위한 비굴한 과정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행위는 ‘카르얌’kāryaṁ, 그가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고유한 임무이자 임무다. 요가수련자는 세상을 밝히는 불이다. 불은, 만물이 자신의 위치를 확인 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스스로 태우는 빛이다. 요가수련자는 불이다. 불은 자신을 소멸하여 어둠을 불리치는 그 자체이지, 그 이상 무엇을 추구하지 않는다. 2019년이 두 날 남았다. 내가 이 기간 동안 펼칠 나의 언행言行은 그것 자체인가, 아니면,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인가? 그 언행은 단호하고, 그것 자체가 되고, 압도적이 될 만큼, 스스로에게 부과한 의무인가?
<필자 소개>
고전문헌학자 배철현은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셈족어와 인도-이란어를 전공하였다. 인류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 다리우스대왕은 이란 비시툰 산 절벽에 삼중 쐐기문자 비문을 남겼다. 이 비문에 관한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인류가 남긴 최선인 경전과 고전을 연구하며 다음과 같은 책을 썼다. <신의 위대한 질문>과 <인간의 위대한 질문>은 성서와 믿음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성서는 인류의 찬란한 경전이자 고전으로, 공감과 연민을 찬양하고 있다. 종교는 교리를 믿느냐가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연민하려는 생활방식이다. <인간의 위대한 여정>은 빅히스토리 견지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추적하였다. 이 책은 빅뱅에서 기원전 8500년, 농업의 발견 전까지를 다루었고, 인간생존의 핵심은 약육강식, 적자생존, 혹은 기술과학 혁명이 아니라 '이타심'이라고 정의했다. <심연>과 <수련>은 위대한 개인에 관한 책이다. 7년 전에 산과 강이 있는 시골로 이사하여 묵상, 조깅, 경전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블로그와 페북에 ‘매일묵상’ 글을 지난 1월부터 매일 올리고 있다.
뉴스웨이 안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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