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 공허(空虛)의 상징 ··· 이 가을에 난 무엇을 제거할 것인가
추석이 며칠 전에 왔다 금방 가버렸다. 우주의 주인인 시간은 그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추석이 선물로 주고 간 기묘한 백색을 틴 옥쟁반과 같은 보름달이 어제 밤에도 저 높이 떠올랐다. 보름달은 집근처 설악면에 있는 신선봉神仙峰 위에 검푸른 밤하늘에 턱하니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신비하고 자비로운 빛을 내며 천연덕스럽게 유유자적한다. 저 밑 마당에서 고개를 들고 자신을 응시하는 미물微物인 나를 굽어 살펴보았다. 보름달은 거의 완벽한 원형이다. 50억 년 전, 지구와 화성이 부딪쳐, 그 부스러기들이 지구주위에서 유영하다, 자신의 길을 터득한 행성이 되었다. 달은 지구와 밀고 당기면서 모난 각들을 떨쳐버리고 생존하기 가장 간결한 모양인 원형으로 변모하였다.
달은 지구와 함께 태양주위를 돌면서, 시시각각으로 자신이 지켜야할 자리를 자연스러우면서도 굳건히 지켜왔다. 달은 지구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한다. 그리고 하루에 13도씩 서쪽에서 동쪽을 이동한다. 달이 자신이 정해진 시간 내에 완수해야할 하루여정을 망각하다면, 우주의 고아가 되어 찬란한 빛을 잠시 내다가, 이내 사라질 것이다. 달의 소멸은, 자신으로 끝나지 않는다. 달은 지구에서 바닷물이 밀물과 썰물을 반복하여 융통성이 있는 해안선을 유지시키고 23도 기울어진 지구에 사사시철이라는 자연의 순환과 원칙을 마련해주었다. 달이 사라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지구도 사라지고, 우주 가운데, 그 안에 거주하는 인간도 사라지면, 인간이 자신의 염원을 모셨던 신도 사라질 것이다.
보름달은 충만充滿하지만 동시에 공허空虛하다. 초승달에서 시작하여, 반달 그리고 보름달로 변하는 과정은 연속적이다. 초승달이 반달이며 반달이 보름달이다.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전이轉移하는 과정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달이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태양빛을 온몸으로 반사하여 빛을 반영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변형시킨다. 달의 실제 크기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29.5일에 거쳐 지구-태양-달의 위치 변화에 따라 자신의 달리진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다. 달도 다른 행성과 마찬가지로 태양이 없다면, 암흑이다. 보름달과 초승달은, 빛의 반영정도다. 보름달이 뽐내는 충만은 공허를 위한 준비이며 공허는 충만을 위한 다짐이다.
마당에서 올려본 저 보름달은, 태양 빛을 한껏 받아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지만, 동시에 자신이 스스로 초승달이 되기 위해 결연히 소멸하기 시작한다. 만일 보름달이 충만한 모습을 유지하려 애쓴다면, 그것은 우주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우주의 질서는 균형均衡이다. 올라간 것을 내려오고, 내려간 것은 퉁겨져 올라오기 마련이다. 꽉 찬 것은 덜어진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추구해야할 덕德은 극단極端을 피하고 시시각각변하는 그 오묘奧妙한 중심中心을 잡는 일이라고 말했다.
용기는 만용과 성급함 사이의 중간 어디이며, 절제는 낭비와 인색의 예술적인 가운데다. 그 가운데를 찾으려는 마음이 중용中庸이다. 중용의 존재를 배운 적도 없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극단의 유혹에 빠진다.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정체성이 보상받기 위해서는, 자화자찬이 특징인 극단적인 무리에 편승한다. 자신의 쓸모를 끊임없이 확인해야하기 때문이다. 세상엔 좌도 없고 우도 없다. 나에게 우가 상대방에겐 좌다. 나의 좌가 반드시 좌가 아니다. 더 극단의 좌가 등장하면 나는 우가 된다. 좌우와 같은 명칭을 가지고 내편과 네 편을 가르는 행위는, 열등감와 이기심으로 가득한 인간들의 속임수일 뿐이다.
보름달은 더 이상 자신만만하지 말고, 자신의 주장을 살펴보고 소멸시키라는 표식標式이다. 보름달은 자신이 이제 초승달을 향해 자신을 변신하겠다는 겸허謙虛의 약속이다. 그 충만한 원을 영원히 유지하려는 시도가 오만傲慢이다. 오만은 세상의 심판자인 시간時間을 거슬리겠다는 몸부림이며, 시간을 멈춰 영생하겠다는 망상이다. 추석의 보름달은, 인간에게 이제 덜어 낼 준비를 시킨다. 덜어내는 행위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덜어내야 다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가 창조되기 위해서는 걷어 내야한다. 덜어내는 행위 없이, 새롭고 참신한 시작始作은 없다. 기원전 6세기 한 무명 유대인 작가가 상상한 창조이야기는 덜어냄에 대한 찬양시다. <창세기> 1.1은 종속절로 이렇게 시작한다.
“맨 처음에, 신이 우주를 창조하기 시작했을 때,”
이 문장에서 덜어내는 행위를 담은 동사가 바로 ‘창조하다’다. ‘창조하다’라는 단어를 그리스인들은 ‘크리쪼kritzō’ 그리고 로마인들은 ‘크레아레creare’로 잘못 번역하였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번역을 다시 번역한 서양인들의 번역, 그리고 그 번역을 다시 번역한 한글번역은 ‘창조創造’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창조’는 ‘전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든다’라는 의미다.
<창세기> 1장을 기록한, 유대인 저자의 의도는 다르다. 그(녀)는 ‘바라’bārā라는 히브리 단어를 사용하였다. ‘바라’라는 단어의 의미는 ‘덜고 덜어 더 이상 빼낼 수 없는 상태로 만들다’란 의미다. 창조란 자신의 삶에서 쓸데없는 것,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가려내는 지혜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과거에 내가 의존한 세계를 과감하게 제거해야한다. <창세기> 1.1의 의미는 ‘처음에, 신이 혼돈으로 가득한 하늘과 땅에서 쓸데없는 것을 걷어내기 시작했을 때’로 번역할 수 있다.
태초의 지구의 상태는 공허空虛다. 히브리 저자는 ‘공허’라는 단어를 인간이 숨을 입으로 내뱉을 때, 내는 음성을 흉내 내 ‘토후 와보후’tohu wa-bohu((תֹ֙הוּ֙ וָבֹ֔הוּ))라고 말했다. 이 표현은 의성어擬聲語다. 신이 쓸데없는 것을 제거했기 때문에, 새로운 시작을 위한 공허가 만들어졌다. 공허는 자연적으로 등장하는 현상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응시하고 그 가운데서 우선순위를 정하여, 하위순위를 매정하고 단호하게 제거할 때 도달하는 경지다. 공허空虛의 공空은 ‘빌 공’이 아니라 ‘비울 공’이다.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시커먼 구멍(혈穴) 안에 차있는 이기심을 기반으로 한 구태의연을 하늘과 땅을 하나로 잊어주는 정교한 도구인 공구工具로 빨아들려 제거하는 용기다. 공허空虛의 허虚는, 자신이 선택한 새로운 삶의 전략으로 내 삶을 고즈넉하고 한적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그 전략은 호랑이(虎)처럼 단호하고 강력해야한다. 그러면 나의 하루가 텅 빈 언덕(丘)처럼 고요해 질 것이다. 보름달은 공허의 상징이며, 공허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이다. 나는 이 가을에 무엇을 제거할 것인가? 보름달은 나에게 묻는다. “너는 너의 삶을 움직이는 언덕 위 호랑이를 가슴에 품고 있는가?”
<필자 소개>
고전문헌학자 배철현은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셈족어와 인도-이란어를 전공하였다. 인류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 다리우스대왕은 이란 비시툰 산 절벽에 삼중 쐐기문자 비문을 남겼다. 이 비문에 관한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인류가 남긴 최선인 경전과 고전을 연구하며 다음과 같은 책을 썼다. <신의 위대한 질문>과 <인간의 위대한 질문>은 성서와 믿음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성서는 인류의 찬란한 경전이자 고전으로, 공감과 연민을 찬양하고 있다. 종교는 교리를 믿느냐가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연민하려는 생활방식이다. <인간의 위대한 여정>은 빅히스토리 견지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추적하였다. 이 책은 빅뱅에서 기원전 8500년, 농업의 발견 전까지를 다루었고, 인간생존의 핵심은 약육강식, 적자생존, 혹은 기술과학 혁명이 아니라 '이타심'이라고 정의했다. <심연>과 <수련>은 위대한 개인에 관한 책이다. 7년 전에 산과 강이 있는 시골로 이사하여 묵상, 조깅, 경전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블로그와 페북에 ‘매일묵상’ 글을 지난 1월부터 매일 올리고 있다.
뉴스웨이 안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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