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3·4세 결혼 트렌드, ‘혼맥’ 풍토 탈피정략적 관행 벗고 자녀 자유의지에 맡겨소개팅·사교모임·동창모임서 부부로 발전
2000년대 초반 이후로 결혼을 했거나 현재 결혼을 준비 중인 재계 오너 3·4세 인사들의 최근 결혼 형태를 보면 대부분 정략결혼보다는 연애결혼이 주를 이루고 있다.
과거의 혼맥을 보면 현재 오너인 부모 세대가 자녀의 결혼을 통해 또 다른 발전을 추구하는 정략적 선택이 많았던 반면 최근 사례를 보면 결혼만큼은 자녀들이 스스로 미래를 개척할 수 있게끔 자유 의지대로 개방하는 경우가 잦다.
◇정략적 선택 잦았던 구식 혼맥 = 자녀의 결혼을 통해서 집안과 집안의 연을 잇고 나아가 부모 세대의 영달을 꾀했던 사례는 비단 현대에서만 있던 일이 아니다. 또 우리나라에만 있는 문화도 아니다.
유럽의 경우 왕족이나 귀족 간에 결혼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는 일이 빈번했고 우리나라도 과거 봉건시대에 정치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유력 가문과 혼맥으로 인적 네트워크를 쌓는 경우가 잦았다.
1945년 광복 이후 현재의 시장경제체제가 자리를 잡고 각 기업들이 기반을 닦은 이후 혼맥 쌓기는 더욱 발전한다.
재계 1세대의 혼맥은 재계와 정계의 고리 잇기로 정리할 수 있다. SK그룹은 박정희 정권의 최고 실세였던 고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은 물론 노태우 전 대통령의 집안과 혼맥을 쌓았다. 두산과 한일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손위처남인 고 김복동 전 의원과 혼맥을 맺었다.
재계 2세대로 넘어오면서 혼맥의 중심은 정계가 아닌 재계나 언론계 등으로 향했다. 정치적 영향력보다도 사업에 대한 근간을 넓히기 위해 비슷한 환경을 갖춘 재벌 오너 자녀들과 결혼을 주선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주 지수초등학교 동문 관계였던 고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고 연암 구인회 LG 창업주는 서로의 자녀(삼성가 삼녀 이숙희 씨-LG가 구자학 아워홈 회장)가 부부의 연을 맺으면서 혼맥이 형성돼 화제가 됐다.
고 아산 정주영 현대 창업주는 다섯째 아들 고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을 ‘해운업계 거목’ 고 금석 현영원 신한해운 회장의 딸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결혼시켜 해운업 확장의 기틀을 다졌다. 이 과정에서 발전한 회사가 바로 현대상선이다.
‘거미줄 혼맥’의 주인공으로는 범LG가(家)와 금호아시아나그룹 등이 가장 유명했다. 특히 자손이 많기로 소문난 범LG가는 삼성, 현대차, SK, 한진, 대림, 태광, 경방, 두산, 효성, 벽산, 사조그룹 등과 혼맥이 연결돼 있다.
이 때문에 재계 일각에서는 범LG가의 혼맥을 두고 ‘혼맥을 통해서 경영계와 적극 내통한다’는 뜻의 ‘통혼(通婚)경영’을 펼친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친 재벌가끼리의 혼맥 쌓기가 ‘그들만의 세상’을 추구한다는 사회의 비판이 쏟아졌고 해외 유학 생활을 통해 견문을 넓힌 젊은 재계 3·4세들도 사회의 변화를 의식한 듯 평범한 가문의 자녀들과 교제하는 트렌드가 퍼지게 됐다.
◇신세대 혼맥, 어떻게 시작됐나? = 과거 혼맥은 부모 세대의 인연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대기업 오너와 호형호제를 하던 정치인이나 다른 기업 오너가 서로 혼인에 대한 약속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는 다르다. 이제는 오너 3·4세가 스스로 쌓은 인맥을 통해 반려자를 찾도록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결혼 상대의 부모도 재벌급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부유층에 속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러나 과거의 ‘혼맥’과 최근의 결혼을 연관 짓기에는 무리가 있는 관측이 많다.
자산총액 기준 국내 5대 그룹의 직계 3·4세의 최근 결혼 사례를 봐도 과거의 혼맥 쌓기와 현재의 결혼 트렌드가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40대 미만의 재계 빅5 오너 3·4세 인사 중 결혼에 골인한 사람은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아들 구광모 ㈜LG 상무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장남 신유열 씨 뿐이다.
구 상무의 부인은 중소 식자재회사 오너의 딸이며 신 씨의 부인은 평범한 일본인 여성이다. 두 사람 모두 부모가 연결해 준 ‘정혼자’와 결혼한 것이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최근 웨딩마치를 올린 재벌 오너 3·4세의 결혼 과정을 보면 대부분 지인을 통한 소개로 만났거나 골프나 승마, 수영 같은 취미생활 동호회 형태의 사교모임에서 만나는 경우, 출신 학교 동문 관계에서 부부로 발전한 이들이 많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장남인 박세창 아시아나세이버 사장은 서울 신사중학교 동창인 김현정 씨와 장기 연애 끝에 지난 2003년 결혼에 골인했다. 김 씨는 평범한 교육자 집안의 딸이었다.
지난 2014년 말 ‘땅콩 회항’ 논란 이후 칩거 중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과 성형외과 의사 박종주 씨 부부, 정유경 신세계 사장과 문성욱 신세계인터내셔날 부사장 부부는 나란히 서울 경기초등학교 동창에서 부부로 발전된 사례다.
지난 4월 결혼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외손자 선동욱 씨와 채형석 애경그룹 총괄부회장의 딸 채수연 씨의 결혼도 연애결혼이다. 두 사람의 집안 관계를 보면 혼맥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지만 당사자는 과거형 ‘혼맥’과 전혀 연관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재벌 총수들이 과거의 혼맥 관행을 버리고 자녀들의 결혼을 자녀들의 자유 의지에 맡기는 문화가 퍼지는 것은 그만큼 폐쇄적이던 재계가 개방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례”라며 “정략 결혼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많은 만큼 이같은 풍조는 앞으로 더 강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백현 기자 andrew.j@

뉴스웨이 정백현 기자
andrew.j@newsw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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