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시사회가 열린 후 얼마 뒤 천우희를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워낙 ‘써니’의 이미지가 강했고, 그 이전 ‘마더’에서 보여 준 파격적인 정사신도 오버랩 됐다. 사실 여배우에겐 미안하지만 미인형 외모도 아니지 않나. 좀 강하게 생긴 모습, 그리고 여배우 특유의 새침함을 짐작했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 앉은 천우희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아니 그렇게 보이고 있었다. 영화 ‘한공주’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주 같았고, 공주처럼 보였고, 공주 그대로였다.
“사실 ‘써니’는 내겐 정말 고마운 작품이에요. 하지만 한편으론 나 자신을 가둬버린 벽으로 남아 있기도 해요. ‘한공주’ 때도 감독님이 ‘써니’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셨어요. 제가 눈도 좀 개구리 눈이고(웃음) 강해 보인다고. 그래서 감독님을 설득했죠. 너무 하고 싶어서요. 무슨 작품을, 역할을 하건 그건 내 몫이고 내가 하기 나름 아닌가 하구요. 결국 감독님이 넘어가셨죠.(웃음)”
시사회 후 ‘한공주’에 대한 호평이 쏟아졌다. 아니 이미 해외 여러 영화제에서 주요 상을 휩쓸고 있는 중이다. 중요한 것은 아직 진행형이란 얘기다. 영화 ‘한공주’의 작품성이 큰 주목을 받은 것이겠지만 사실 진짜 주인공은 ‘한공주’에서 ‘한공주’로 출연한 천우희다. 그의 연기에 전 세계가 매료됐다. 세계적인 여배우 마리옹 꼬띠아르가 직접 “천우희의 팬이 됐다”고 할 정도이니 말이다.
“너무 감사하죠. 아니 감사하단 말보단 지금도 솔직히 믿겨지지도 않아요. 와닿는 부분도 거의 없어요. 세계적인 거장 감독과 배우들이 내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는 게. 되게 웃기잖아요. 전 지금도 그냥 밖에 나돌아 다녀도 알아보는 분 한 명도 없어요. 그냥 평범한 20대인데 그런 엄청난 분들이 날 거론하고 있다는 것, 너무 엄청난 일이라.(웃음)”
그의 웃음이 봄바람처럼 싱그러웠지만 사실 영화는 칠흙보다 더 어두운면을 갖고 있다. 아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촛불 하나가 켜져 있는 모습이다. 앞서 말한 ‘한공주’ 속 천우희가 맡은 역할이 가해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영화 속 천우희 그러니까 ‘한공주’는 수십명의 고등학생들에게 집단성폭행을 당한 피해자였다. 실제 있었던 밀양 성폭행 사건이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됐다. 천우희가 배우란 직업을 떠나서라도 결코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을 영화 속 공주는 겪은 것이다. 천우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시나리오를 읽고 ‘내거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영화에 빠졌다고 생각했지만, 공주의 그런 상황을 대체 이 세상 누가 이해할 수 있겠어요. 아마 그래서 감독님도 첫 촬영을 성폭행 장면으로 잡으신 것 같아요. 공주의 감정과 상황을 알고 시작하라는 ‘배려’셨던 것 같아요. 촬영이요? 당연히 힘들었죠.(웃음) 감독님이 왜 그 장면을 먼저 찍자고 하셨는지도 알 것 같아서 당연히 따랐구요. 마음의 준비가 단단히 돼 있었죠.”
하지만 그의 말처럼 막상 촬영에 들어가자 온 몸에 피멍이 들 정도로 괴로웠다고. 43명의 고등학생들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은 텍스트로만 쓰여졌고, 실제 영화에서도 간접적으로 등장할 뿐이다. 그러나 그 텍스트는 오롯이 천우희에게 감정으로 전달됐고, 그 감정은 다시 천우희의 또 다른 분신 한공주를 통해 관객들에게 이입됐다. 천우희는 “각오가 돼 있던 부분이고, 정말 경건하게 임했다고 해야 할까”라며 “집에 오자 엄마가 ‘전쟁영화 찍었냐’고 물으실 정도로 온 몸이 녹초가 됐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진짜 힘들었던 장면은 따로 있었단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한강 수영신이라고. 날씨가 꽤 쌀쌀한 10월 쯤 세트장에서 촬영을 했다. 세트장이 산 속에 있었기에 더욱 추웠다. 수조 안에 담겨진 물은 말 그대로 얼음장이었다. 무려 8시간 동안 촬영을 했다. 천우희는 “그때는 정말 눈물이 나서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까지 갔었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힘들고 죽을 만큼 고생을 했지만 천우희를 괴롭했던 것은 한공주의 감정이었다. 육체적 정신적 극단으로 몰리는 공주는 부모님에게도 버림을 받고, 끔찍한 성폭행을 당했으면서도 피해자가 아닌 오히려 가해자로서의 시선을 받는다. 극중 대사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란 말은 그래서 보는 이들을 더욱 미안하고 또 죄스럽게 만드는 ‘한공주’ 속 단 한 줄이었다.
“너무 힘들어요. 그런데 난 힘들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어요. 하지만 주변에서 그렇지가 않은 거죠. 그렇다고 그 주변의 시선이 그 사건 속으로 개입을 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뭔지 모를 불편한 시선만 보내는 거에요. 어쩌면 그런 시선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 있을 ‘한공주’를 벼랑으로 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요. 그냥 그 친구들이 그런 상처를 잊을 수 있게 바라봐 주고 옆에서 같이 숨쉬어 주는 것. 그게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해요.”
지금쯤 공주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천우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 같았다. 공주의 힘들었던 삶에 천우희를 잠시 감정의 바다에 빠트린 것 같았다. 눈물을 머금은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 잘 살고 있을 거에요. 갑자기 그 힘들었던 일이 생각나서 괴롭기도 하고 죽고 싶을 만큼 아프기도 할 거에요. 하지만 그래도 아무일 없다는 듯이 웃지는 못하더라도 씩씩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응원하고 싶어요.”
영화 ‘한공주’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리고 배우 천우희가 공주에게 우리가 모르고 있던 것을 이해시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공주의 그 눈망울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천우희의 그 눈물을 머금은 눈망울도 함께.
배우 천우희 그리고 영화 ‘한공주’, 올해 한국영화가 찾아낸 반짝이는 두 보석이다.
김재범 기자 cine517@

뉴스웨이 김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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