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술잔을 기울이며 자신의 캄캄한 현실에 대해 말하기도 또 신기루 같은 판타지에 대해 논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마음에 담아두었던 고충이 해소되기도 하고 또 타인에 대한 공감을 통해 위로되기도 한다.
이렇게 지인들과 두런두런 함께하던 술자리 같은 드라마가 있다. 케이블채널 tvN ‘미생’(극본 정윤정, 연출 김원석)이 그 주인공이다. ‘미생’에는 악녀 연민정도 없고, 천사 장보리도 없다. 아이돌 출신 꼬리표를 뗀 장그래와 무대에서 활약했던 무명의 배우들이 있을 뿐이다. 그들이 그리는 현실감 있는 스토리와 판타지에 대중은 열광했다.
‘미생’ 신드롬은 드라마가 주부들의 전유물이라 치부하는 시대를 종식시키고 다양한 연령층에서 공감대를 이끌고 있다. 유료 시청자를 보유한 케이블 채널에서 일으킨 이 돌풍이라는 점에서 그 시사하는 바는 더 크다.
◇ 고졸·낙하산 출신 장그래의 현실과 판타지
장그래(임시완 분)는 스물여섯이지만, 평생 바둑알을 손에 잡고 살아온 탓에 회사에서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는 청년이다. 게다가 검정고시에 응시, 겨우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소위 ‘스팩 사회’인 요즘 이런 청년의 입사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낙하산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인턴으로 입사한 장그래에게 가장 먼저 건네진 질문은 “어느 대학 출신이냐”는 것. 그 때마다 장그래는 그럴싸한 말로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고등학교 졸업장이 전부”라고 솔직히 답했다. 대답 뒤에 동기들 표정은 그야말로 황당함 그 차제였다. 이 때 누군가 “상무 낙하산 타고 내려왔다”는 말로 상황을 정리한다.
이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아 많은 시청자들이 놀랐다. 현실에서 고졸 사원이 원 인터네셔널 급의 회사에 입사하기란 불가능하다. 낙하산이라면 다르지만.
이후 장그래는 직장에서 보기 좋게 왕따를 당한다. 심지어 같은 부서인 영업 3팀 오상식 과장(이성민 분)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아부도, 생색도 없는 묵묵함으로 오 과장의 인정을 받았다. 세상 그 어디에서도 소속되지 못한 외로움을 오 과장의 “우리 애”라는 한 마디로 치유받고 눈물을 떨군다.
또 고(高) 스펙으로 입사한 동기들이 장그래를 동기로 인정해줄 리 만무하다. 이 상황에서 장그래는 자신만의 열정으로 야금야금 마음을 얻어간다. 하지만 끝까지 인정해주는 동기는 없다. 장그래가 동기들의 인정을 받은 것은 최종 PT를 거쳐 신입으로 입사한 후였다. 이 역시 현실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다.
장그래는 특유의 성실함과 아이디어로 결국 계약진 신입사원으로 정식 입사하게 되었다. 사회에서 상사들의 눈치를 보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이러한 눈치와 센스는 아랫사람의 필수 덕목이다. 장그래에게 눈치는 없지만 답답한 상황과 마주할 때 “기회를 주실 수 있잖아요”라고 묻는 모습은 현실에서라면 쉽지 않은 패기다. 이러한 패기는 시청자들에게 실제 상황에서 발휘하지 못하는 패기 넘치는 모습을 통해 대리 만족을 안기고,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를 느끼게 하며 판타지를 충족시킨다.
장그래의 성실함과 묵묵함은 중, 장년층에게도 지지를 받았다. ‘우리 회사에도 저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심을 다해 일해 줄 수 있는 부하 직원이 있으면 좋겠다’는 판타지에 대한 대리만족이다. 이는 실제 회사 상사들이 아랫사람들에게 ‘장그래를 보고 배워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을 만큼 적지않은 파장을 불렀지만, 현실에서 장그래 찾기는 접어두시길 당부하고 싶다.
◇ 우리시대 직장인 가장 섬세하게 표현한 오 과장
오상식 과장은 영업 3팀의 부하 직원을 위해 머리를 숙일 줄 아는 상사다. 김 대리가 좌천 위기에 처하자 오 과장은 부장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어떻게 해서든 좌천을 막는다. 이 역시 눈치 빠른 김 대리가 모를리 없지만, 자신의 좌천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 사실을 알고 김 대리는 더욱 충성을 다짐한다.
오 과장은 미숙한 듯, 어리바리 한 듯 보이지만 날카로운 안목과 뛰어난 기지를 발휘하는 인물이다. 더벅머리를 긁적이고 너털웃음을 지어 보이지만 모든 상황을 꿰뚫고 있다. 이러한 혜안은 장그래의 성장을 견인한다. 바둑 외에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장그래의 진심을 발견한 오 과장은 옆에서 그를 지켜보며 조용히 성장을 돕는다.
거창한 오더(Order)나 큰 소리로 호통을 치며 생색내기 식의 가르침은 없지만, 조용히 그의 성장을 조련하며 지원사격한다. 계약직 사원인 장그래를 오 과장처럼 가르치는 상사를 현실에서는 발견하기 힘들다.
집에서는 비상금 봉투를 척 던지며 부인에게 용돈을 받아쓰는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다. 전쟁 같은 직장생활이 힘들고 그만두고 싶지만 세 아들을 보며 웃음을 찾는다.
오 과장은 우리 시대 직장인을 가장 섬세하게 그렸고, 장그래 역시 우리 시대 불안한 청춘을 투영했다. 이들은 가장 현실적이지만 그렇기에 많은 직장인들의 판타지를 집약시켜 가장 비현실적인 캐릭터로 발현시켰다.
‘미생’이 인기를 얻는 배경에는 공포영화보다 더 무서운 현실을 적나라하게 펼치며, 직장인들에게 공감을 안기고 또 공감을 통해 치유를 선사하는 데 있다.
편견과 싸우며 누군가를 탓하지 않고, 관계 속에서 재미를 안기는 ‘미생’이 러브라인 없이도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미생’ 김원석 PD는 “전쟁터 같은 직장의 치열함을 자세하게 묘사하려 했다”고 연출의도를 전했다. ‘미생’은 어쩌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드라마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이 바로 ‘드라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이슬 기자 ssmoly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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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웨이 이이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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