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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오피니언 데스크 칼럼 정백현의 골든크로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등록 2023.03.15 15:24

정백현

  기자

reporter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독자 여러분께서는 과거 제약회사의 광고 자막이나 약품의 설명서에 등장했던 이 표어를 혹시 기억하고 계십니까.

이 표어는 1990년대 말까지 등장했다가 2000년 의약 분업이 실시된 이후부터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문구가 됐습니다. 더 이상 의사에게 다짜고짜 약 달라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의약 분업 이후 진료와 처방은 의사의 권한, 투약은 약사의 권한으로 정해졌습니다.

어린 시절 갔던 병원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진료부터 투약까지 모든 과정을 병원에 있는 의사와 간호사가 전담했습니다. 병원에서 약을 받아간 이후 약국에 또 간 일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시절 여러 의약품이 오남용 처방됐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픈 몸을 바르게 고치려면 해당 증상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는 의학 전공자 출신 의사에게 진찰과 처방을 받고 확실한 효능의 약을 적당하게 받으려면 약학을 전공한 약사에게 가야 합니다.

다짜고짜 의사가 아닌 약사에게 가서 "아파죽겠으니까 지금 당장 약사님이 내 엉덩이에 센 주사 놔주세요. 약사도 어차피 다 알잖아요"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당연히 지금 약국에 가서 이런 말을 하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사람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진 재능이나 그동안 살면서 배웠던 것들을 다방면으로 뽐낼 수 있는 분야가 있습니다. 보통 이를 전공 분야라고 하죠. 비전공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일이 손에 익숙하지도 않고 안팎으로 거센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거취를 두고 여러 말이 많습니다. 빠르면 오는 5월, 늦어도 7월쯤에는 금감원장에서 물러나 내년 국회의원 총선 출마 준비에 돌입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시장 안팎에서 파다하게 퍼진 소문입니다. 물론 이복현 원장은 자신의 출마설을 부인했습니다.

이 원장은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해 6월 7일 취임했습니다. 이 원장은 로스쿨을 졸업한 법조인 출신이지만 서울대 재학 시절에는 경제학을 전공했습니다. 공인회계사 출신이기도 하죠. 그리고 금감원에 오기 직전까지 그의 직업은 촉망 받던 엘리트 검사였습니다.

이 원장의 취임 당시 금융권 안팎에서는 "검사 출신이 무슨 금감원장이냐"라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이 원장 스스로도 이 비판을 알고 있었고 안팎으로 노력한 부분이 많았던지 직무 전문성 관련 논란은 다소 사그라졌습니다. 그렇다고 이 원장이 모든 일을 깔끔하게 잘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원장 스스로 총선 출마설을 부인했지만 시장 안팎에서는 이 원장에 대한 거취 논란이 여전합니다.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떻게든 총선에 나가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죠. 더구나 이 원장이 금감원을 떠난 후 그 자리를 메울 후임 원장에 또 다시 현직 검사 출신 인사가 올 것이라는 이야기는 자본시장 안팎 관계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있습니다.

금감원처럼 검사 본연의 업무와 무관한 분야로 검사 출신 인사가 수장에 선임될 것이라는 우려는 괜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다른 분야에서도 '전직 검사'가 속속 자리를 메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국민연금 기금의 중요사항을 의결하는 기금운용위원회의 상근전문위원에 경제단체 추천으로 전직 검사인 한석훈 변호사가 선임됐습니다. 이 자리에는 보통 금융 전문가나 기관 투자 관련 전문가들이 왔지만 이례적으로 검사 출신이자 법학자 출신 인물이 왔습니다.

한 변호사가 과거 로스쿨에서 상법과 증권 관련법 등을 강의했다고는 하지만 현장 업무를 잘 아는 전문가로 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정책 관련 경험 없이 관련 법 지식만 깊은 사람을 과연 전문가라고 볼 수 있을까요? 법을 잘 알면 수익률 올리는 법도 잘 아는 것일까요?

국내 자본시장 관련 기관에서는 비전문가 출신 인사 선임 우려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캠프에서 일했던 은행 전문가 출신 이순호 사장이 최근 선임된 예탁결제원에서는 이 사장의 취임 초기부터 적지 않은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또 올해 말에 임기가 끝나는 손병두 한국거래소 이사장의 후임에도 검사 출신 인사가 오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임기 만료를 무려 9개월이나 앞둔 현 시점부터 스멀스멀 나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불안하면 이런 이야기가 벌써부터 나오겠습니까.

경제·금융·증권 관련 현안을 직접 다뤄본 적은 없지만 검찰에서 금융·증권 범죄를 다뤄본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에 정책도 잘 수립할 수 있다는 논리는 몇 번을 곱씹어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곳간 주변에 쥐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치밀한 전략을 짜야 하는 상황에서 "쥐잡이들이 쥐를 많이 잡아봤으니까 쥐를 못 오게 하는 법도 잘 알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돈이 흐르는 자본시장에서 금융·증권 관련 정책을 올바로 수립하고 실행하려면 법리에 빠삭한 법조인보다는 시장의 원리를 잘 알고 돈의 흐름을 짚어본 경험을 갖춘 금융·증권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법전을 아무리 뒤져도 자본시장의 흐름을 읽는 법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번 정부에서 앞으로 임명될 자본시장 관련 부처나 기관의 수장들은 부디 사법연수원 출신 인물이 아닌 경제·금융·증권 관련 부처나 기관 출신이길 애타게 바라봅니다.

'백면서생'이라는 고사성어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중국 남북조시대 송나라(유송)의 황제 문제는 남쪽 임읍을 평정한 뒤 북위를 공격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북위에 대한 공습, 이른바 '북벌' 대책을 논의하면서 무신을 배제하고 문신들과 의견을 주고받았습니다.

이 광경을 본 유송의 무신 심경지는 문제에게 "전쟁을 하시려면 무신들과 의논을 하셔야지 왜 문신들과 의논하십니까?"라고 따졌습니다. 이때 심경지가 문신들을 빗댄 말이 '집 안에서 글만 읽어 얼굴빛이 하얀 사람'을 뜻하는 '백면서생'입니다.

전쟁을 제대로 이끌어 본 경험이 없는 문신의 말만 듣고 전쟁에 나서서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이 심경지의 말이었는데요. 결과는 당연히도 유송의 대패였습니다. 요즘 백면서생이란 말은 '세상 물정에 어둡고 실제 경험이 없는 사람'을 칭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자본시장에 온갖 먹구름이 끼는 상황에서도 시장 경험을 두루 갖춘 베테랑 전문가들의 말 대신 법전에 나온 내용만 달달 외웠던 사람들과 대책을 논한다면 우리 자본시장도 분명 도태될 것입니다. 제발 정신 좀 차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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