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쿠팡 도망친 책임, 남겨진 분노

오피니언 데스크 칼럼 서승범의 유통기안

쿠팡 도망친 책임, 남겨진 분노

등록 2025.12.17 15:49

서승범

  기자

reporter
3370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초유의 사태 앞에서 쿠팡은 끝내 최악의 선택을 했다. 국민이 요구한 것은 거창한 변명이 아니었다. 책임자의 얼굴을 보고, 고개 숙인 사과 한마디를 듣고 싶다는 최소한의 요구였다. 그러나 쿠팡은 그 요구를 외면했다.

17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열린 개인정보 유출 사태 관련 청문회장에 김범석 쿠팡 Inc 의장의 모습은 없었다. 대신 증인석에는 한국어 소통조차 원활하지 않은 외국인 임원 두 명이 앉았다. 해롤드 로저스 대표이사와 브랫 매티스 CISO였다.

김 의장은 "글로벌 CEO"라는 이유로 10년째 이어진 국회 증인 출석 요구를 또다시 거부했고 사고 책임자 중 한 명인 박대준 전 대표는 퇴사를 이유로 불출석했다.

국내 최대 규모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를 일으켜 놓고도 사안의 무게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태도다. 국회를 무시한 것을 넘어, 대한민국 국민을 가볍게 여긴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이날 청문회에서 의원들이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질타한 이유다.

그간 쿠팡이 공들여온 대관 전략도 한순간에 무너졌다. 수백억 원을 들여 대관 조직을 키우고, 강남에 비밀 거점까지 마련하며 국회와 정부를 상대로 관계를 다져왔지만 정작 결정적 순간에 최고 책임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이번을 계기로 국회와 정부가 쿠팡과 분명한 선을 긋게 될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온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비판은 거셌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사고 경과와 책임 소재를 끝까지 규명하겠다"고 했고, 국민의힘 의원들마저 "대한민국에서 사업을 포기한 것과 다름없다"고 강하게 질타했다. 정치적 공방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책임의 문제라는 뜻이다.

사과하지 않은 대가는 법과 제도로 돌아오고 있다. 집단소송제 도입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고, 쿠팡 사태 이후 발의·처리된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안만 다섯 건에 이른다. 중대한 개인정보 유출 기업에 전체 매출의 최대 10%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는 법안도 상임위를 통과했다. 비록 소급 적용은 되지 않지만, 쿠팡의 국내 사업 환경이 이전처럼 순탄할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혁신 기업은 기술로 성장하지만 신뢰로 존속한다. 쿠팡의 혁신 속도와 달리 김범석 의장의 책임 인식은 한참 뒤처져 보인다. 국경을 넘는 기업일수록 책임은 더 분명해야 한다. 고개 숙일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선택의 후회는 오래 남을 것이다.
ad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