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5일 오후 9시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을 포함해 476명을 태우고 인천항을 떠나 제주로 향한 세월호. 다음날 오전 8시 52분 단원고 2학년 최모군의 구조요청과 함께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오전 9시 35분경 현장에 도착한 목포해경 123경비함정. 해경은 퇴선 방송을 하지도, 탈출을 돕지도 않았습니다. 선내에선 움직이지 말라는 안내방송만 반복됐지요. 그새 이준석 선장과 선원 15명은 해경의 도움을 받아 배에서 가장 먼저 탈출했습니다.
오전 11시 50분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되기까지 그 누구도 구조를 지휘하지 않았고, 언론과 방송에선 ‘전원구조’라는 어처구니없는 오보를 쏟아냈습니다.
사고 발생 7시간 만에 나타난 대통령의 발언은 국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지요.
정부가 선정한 구조업체 언딘에 민간 잠수사들까지 더해진 수색 작업. 알파잠수기술공사 이종인 대표의 다이빙벨 투입을 놓고 보인 해경과 언딘의 이해할 수 없는 모습들을 뒤로하고, 같은 해 11월 11일 미수습자 9명을 남긴 채 수색은 종료됐습니다.
실종자 수색이 진행되는 가운데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은 검찰 소환에 불응하고 도주했는데요. 결국 2014년 6월 12일 변사체로 발견됐습니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은 2014년 7월 14일, 앞서 결렬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였습니다. 이때 옆에서 온라인 커뮤니티 ‘일베’의 회원들은 피자와 치킨을 먹으며 희생자 가족을 조롱하는 등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2014년 11월엔 세월호 관련 법안이, 2015년 1월엔 세월호 배상과 보상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합니다. 이 과정에서 여당을 중심으로 쏟아진 막말은 희생자 가족들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지요.
2015년 3월 5일부터 공식 활동을 시작한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큰 기대를 모았지만 여당에서 제기한 ‘예산낭비’ 논란과 정부의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등에 발목을 잡히며 활동에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았습니다.
정부는 2015년 4월 세월호 인양을 결정하고 상하이샐비지를 인양업체로 선정합니다. 2016년 7월 세월호의 선수를 드는 데 성공, 선미에 리프팅빔 등을 설치했지만 11월 동절기 작업 여건 악화를 이유로 세월호 인양은 해를 넘기게 됩니다.
전례 없는 국정농단과 대통령 파면이 이어졌고, 세월호는 물속으로 가라앉은 지 1073일 만인 2017년 3월 23일 물 위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4월 11일엔 육상 거치 작업이 완료돼 마침내 뭍으로 올라왔지요.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수많은 아픔을 겪었던 세월호. 다시는 이처럼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아직 돌아오지 못한 9명의 미수습자가 꼭 가족의 품에 안길 수 있길 기원합니다.
뉴스웨이 이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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