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열린 시장과 그 적들: '독단 경영'과 '중우(衆愚) 경영'

전문가 칼럼 류영재 류영재의 ESG 전망대

열린 시장과 그 적들: '독단 경영'과 '중우(衆愚) 경영'

등록 2025.12.22 09:00

수정 2025.12.22 10:37

열린 시장과 그 적들: '독단 경영'과 '중우(衆愚) 경영' 기사의 사진

플라톤의 선장과 포퍼의 감시자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철인(哲人)정치를 설파하며 국가를 항해하는 배에 비유했다. 거친 파도와 암초가 도사리는 바다에서 승객(대중)의 투표로 뽑힌 사람이 키를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항해술과 천문학, 배의 메커니즘에 통달한 전문가가 선장이 되어야만 목적한 항구에 안착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오늘날 엘리트주의의 원형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20세기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는 명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통해 플라톤을 통렬히 비판했다. 그는 "누가 통치하느냐"보다 "나쁜 통치자를 어떻게 피 흘리지 않고 끌어내릴 수 있느냐"가 핵심이라 역설했다. 아무리 뛰어난 선장이라도 오류를 범하거나 타락할 수 있기에, 비판적 합리주의에 입각한 견제 시스템이야말로 민주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밀의 복수 투표제와 자본시장의 차등의결권

이 논쟁에 19세기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을 대입하면 논의는 더욱 흥미로워진다. 밀은 '다수의 폭정'과 '대중의 무지'를 경계하며, 기계적인 '1인 1표' 대신 지적 능력이 입증된 전문가에게 더 많은 표를 주는 '복수 투표제(Plural Voting)'를 제안했다.

이러한 정치철학적 담론은 오늘날 자본시장, 특히 '1주 1표(One Share, One Vote)'가 지배하는 주주 민주주의 현장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밀의 주장은 현대 자본시장에서 구글 등이 채택한 '차등의결권(Dual Class Stock)'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기업이라는 배를 운항하기 위해서는 해당 산업에 대한 깊은 통찰과 장기적 비전이라는 고도의 '항해술'이 필수적이다. 여기서 창업자나 경영자에게 일반 주주보다 강력한 의결권을 부여해 '단기주의(Short-termism)'의 파도로부터 기업의 지속성장을 지원하는 것은, 밀이 꿈꿨던 '숙련된 항해사'를 보호하는 장치인 셈이다.

무너진 규범: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의 실종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 최근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지적한 민주주의 붕괴의 징후들이 자본시장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저자들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두 가지 핵심 규범으로 '상호 관용(Mutual Tolerance)'과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를 꼽았다.

이 지점에서 최근 우리 자본시장을 보자. 경영진(지배주주나 이들을 지원하는 전문가그룹)과 행동주의 펀드(혹은 소액주주 연대나 그 지원 그룹) 사이에는 생산적 긴장감을 넘어선 비생산적 적대감이 팽배해 있다. 경영진은 합리적인 주주 제안조차 '경영권 탈취'로 규정하며 불통의 벽을 쌓기에 급급하고, 반대로 일부 투기적 주주들은 기업의 장기 성장 잠재력을 훼손하면서까지 과도한 주주환원 등을 요구한다. 법적으로 보장된 권한이라도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자제해야 한다는 '제도적 자제'의 미덕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치킨게임이며, 거위의 배를 가르는 행위와도 유사하다.

독단 경영과 중우 경영 사이, '이사회'의 역할

우리는 플라톤의 '전문성'과 포퍼의 '견제'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경영진의 독단(Agency Problem)을 방치하면 기업은 사유화되고, 무책임한 주주들의 목소리가 과잉 대표되면 기업은 '중우 경영(Mob Management)'의 덫에 걸린다.

결국 해법은 균형이다. 배의 키는 항해술을 알고 책임있는 선장이 잡아야 한다는 플라톤의 원칙은 유효하다. 그러나 그 선장이 혹여 항로를 이탈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포퍼의 시스템 또한 필수불가결하다. 자본시장에서 그 균형추 역할을 해야 할 곳은 바로 '이사회(Board of Directors)'다.

이사회는 경영진의 전문성을 존중하되(상호 관용), 그들이 주주 전체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내릴 때 가차 없이 제동을 걸 수 있어야 한다(제도적 자제와 견제). 또한 주주들 역시 단기 수익 추구를 넘어 기업의 장기적 동반자로서의 '수탁자 책임(Stewardship)'을 자각해야 한다. 특히 국민연금과 같은 공적 연기금 주주들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

정치가 성숙한 시민 의식 위에서 꽃피듯, 자본시장 역시 '책임 있는 주주'와 '투명한 경영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유능하고 독립적인 이사회'라는 삼각편대가 갖춰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신뢰와 책임이라는 규범이 사라진 시장은,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와 같다. 여기서 기업(배)의 안전 항해는 늘 위협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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