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에 대한 전방위 압박정치적 목표가 경제방향 결정시장 조정 아닌 시장통제 확산

한국경제의 작동원리가 변하기 시작했다. 기업의 투자, 노사관계, 공기업 운영, 가격 형성에까지 정치가 깊숙이 개입하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개별 정책만 놓고 보면 서로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하나로 연결해 보면 우려할 만한 방향성이 드러난다.
기업의 투자 의사결정에 정부가 개입하기 시작했다. 최근 대통령이 참석한 국민보고회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의 대규모 지역 투자계획이 발표됐다. 정부는 용수·전력·인프라 지원과 설득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기업의 입지 결정은 원래 수익성, 공급망, 인력, 물류 등 시장 논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투자 여건이 충분히 마련되기 전에 대규모 투자계획부터 발표되는 모습은 정상적인 시장경제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과 압박은 실제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설탕, 밀가루, 제지업계 등에 역대급 담합 과징금을 부과했다. 설탕3사에 부과된 과징금은 한 해 설탕매출의 50%에 달한다. 밀가루에 대해서는 20년 만에 가격재결정명령도 발동됐다.
삼성전자 노사분규 과정에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 노사 자율 원칙을 흔들었다는 논란도 제기됐다. 국민연금은 적극적 의결권 행사와 대표소송 확대를 예고하면서 기업 경영에 대한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공기업 경쟁체제를 다시 통합체제로 되돌리려는 움직임도 있다. KTX와 SRT의 통합은 이미 진행 중이고, 인천국제공항공사와 한국공항공사 통합, 발전자회사 재통합 등이 논의되고 있다. 경쟁을 통해 효율성을 높이려던 개혁을 거꾸로 되돌리는 것이다. 통합하면 정부의 통제력은 강화될 것이나, 경쟁과 책임경영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흐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드골 정부의 시장개입을 디리지슴(Dirigisme)이라고 말한다. 기업은 민간이 소유하되 정부가 산업과 투자방향을 적극적으로 이끄는 경제운영방식을 말한다. 굳이 번역하면 '국가(가)지도(하는)경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디리지슴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산업발전을 위한 국가의 조정을 넘어, 정부의 시장개입이 앞서 살펴본 것처럼 다방면에서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은 정치적 목표가 경제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주도 시장경제'로의 이행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정부가 경제적 효율성 보다는 정치적 목적을 우선하여 개별 기업의 경제적 의사결정에 '반복적',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경제운용방식이다.
정치주도 시장경제가 정착되면 기업은 소비자보다 정부를 먼저 바라보게 된다. 투자 효율성은 떨어지고 기업의 정치 의존성은 높아진다. 혁신보다 순응이 유리해지고 투자 결정은 경제 논리가 아니라 정치 논리에 좌우될 위험이 커진다. 결국 국가 전체의 생산성과 성장잠재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자유시장경제는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지 않는다. 작은 개입이 반복되고 예외가 관행이 될 때 시장경제는 서서히 생명력을 잃고,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체제가 들어서게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 정부에 대한 찬반논쟁이 아니다. 한국경제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냉정한 성찰이다. 그 선택의 결과는 분명 우리 세대뿐 아니라 다음 세대가 살아갈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강영철 좋은규제시민포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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