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AI를 빼고 산업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제약·바이오도 예외는 아니다. AI 신약개발은 이제 기업 전략의 핵심 키워드가 됐고, 신약개발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 그렇다면 AI는 정말 신약개발의 속도를 높였을까.
정답을 말하자면 '완전히'는 아니다. AI는 후보물질을 찾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였지만, 신약개발 전체의 속도를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실험과 검증이다. 후보물질 발굴 과정의 병목이 크게 완화되면서 이제는 실험실이 신약개발의 새로운 병목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최근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발간한 '피지컬 AI 시대의 자율실험실(SDL)'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보고서는 AI 신약개발의 핵심 과제로 알고리즘 경쟁보다 AI의 예측과 실험, 데이터 축적, 재학습을 하나의 체계로 연결하는 연구 자동화 시스템 구축을 제시했다. AI의 예측과 실험, 데이터 활용이 하나의 선순환 체계로 연결돼야 AI의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의미다.
AI를 바라보는 업계의 시각도 달라지고 있다. 최근 열린 바이오차이나 포럼에서는 초기 바이오벤처도 AI를 연구개발과 함께 가져가야 한다는 의견이 잇따랐다. AI는 더 이상 일부 기업만의 차별화 요소가 아니라 신약개발의 기본 역량이 되고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AI를 도입하는 것만으로 경쟁력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AI가 제안한 결과를 얼마나 빠르게 검증하고 다시 연구개발 과정으로 연결할 수 있느냐가 새로운 경쟁력으로 주목받고 있다.
글로벌 빅파마들은 이미 연구 자동화 경쟁에 뛰어들었다. 일라이 릴리는 2020년 스트라테오스(Strateos)와 협력해 후보물질 설계부터 합성, 정제, 분석, 가설 검증까지 하나의 자동화된 폐쇄형(closed-loop) 연구 시스템으로 연결한 로보틱 클라우드 랩을 구축했다. 설계(Design)-제작(Make)-시험(Test)-분석(Analyze)으로 이어지는 연구개발 과정을 하나의 플랫폼으로 구현해 신약 발굴 속도를 높이기 위한 시도다. AI가 새로운 후보를 제시한다면, 이를 가장 빠르게 실험하고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먼저 갖추려는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국내에서도 AI 신약개발 기업은 빠르게 늘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경쟁력은 AI를 실제 연구개발 성과로 연결할 수 있는 연구 인프라가 좌우할 가능성이 크다. AI가 제안한 후보물질을 신속하게 검증하고, 그 결과를 다시 다음 연구로 연결하는 체계를 갖춘 기업일수록 더 많은 가설을 더 짧은 시간 안에 검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AI 시대에는 뛰어난 예측 능력만큼,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 자동화와 실험 인프라의 중요성도 커질 수밖에 없다.
AI는 신약개발의 병목을 없애지 않았다. 다만 그 위치를 바꿨다. 과거에는 후보물질을 찾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면 이제는 AI가 제안한 결과를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검증할 수 있느냐가 신약개발 경쟁력을 좌우하고 있다.
AI 시대 신약개발의 승부는 더 뛰어난 AI를 확보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진짜 경쟁은 AI 기술 그 자체를 넘어 그 결과를 가장 빠르게 검증해 내는 '실험실'의 속도전으로 옮겨가고 있다.
뉴스웨이 현정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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