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2월은 배터리 산업 전반에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불과 열흘 사이 두 차례 고객사 계약이 해지되며 약 13조5000억원 규모의 수주를 잃었다. SK온은 포드와의 합작사 관계를 정리했고, 서산공장 증설 공사 일정도 미뤘다. 소재 업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엘앤에프는 테슬라와의 양극재 계약이 사실상 무산됐고, SKC는 2021년부터 공들여온 양극재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전기차 시장의 '캐즘(Chasm)'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특히 미국 전기차 구매 보조금 정책이 결정타였다. 2032년까지 유지될 예정이던 제도가 지난해 10월, 예정보다 7년 앞당겨 종료되자 북미 완성차 업체들은 즉각 감산과 재고 조정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여파는 고스란히 배터리와 소재 산업으로 번졌다.
전기차 캐즘은 2023년 처음 등장한 개념이다. 초기 수요층에서 대중 시장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일시적 공백이라는 점에서, 당시에는 단기 조정에 그칠 것이란 기대가 컸다. 실제로 지난해 9월 북미 전기차 판매가 전년 대비 66% 급증하며 '탈출 신호'가 감지되기도 했다. 그러나 보조금 정책 폐지라는 변수 앞에서 그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문제는 배터리와 소재 기업들이 이 변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완성차 발주라는 핵심 축이 흔들리자, 그 아래에 있는 산업 전반이 연쇄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국내 배터리 기업들의 공장 가동률이 50% 초반에 머무는 이유다. 죄 없는 배터리와 소재 기업들만 다시 캐즘의 한복판으로 끌려들어온 형국이다.
3년 가까이 버텨온 끝에 더 큰 파도가 밀려오자 업계 곳곳에서는 무력감과 체념이 묻어난다. 한 배터리 업체 관계자는 "전기차 캐즘은 배터리 업계 노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운이 따라줘야 한다. 종교라도 믿어야 할 판"이라며 씁쓸한 농담을 건넸다. 웃음 섞인 말이지만, 그 속엔 깊은 피로감이 배어 있다.
그럼에도 지금 필요한 것은 체념이 아니라 버팀이다. 업황이 좋을 때보다 나쁠 때, 기업의 진짜 체력이 드러난다. 해외 출장 시 임원 좌석을 이코노미석으로 바꾸는 수준의 긴장감과 절박함이 올해도 이어지길 바란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처럼,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뒤에야 비로소 하늘을 논할 수 있다.
내실을 다지고, 비용을 조이고, 기술과 품질 경쟁력을 더 단단히 쌓는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 반등의 순간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때 다시 질주할 수 있는 힘을 남겨두는 것, 그것이 지금 K-배터리 산업이 선택해야 할 가장 현실적인 전략이다. 나는 여전히 K-배터리의 저력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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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웨이 고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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