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서울 마라톤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풀코스 참가자 21,534명 중 1,894명이 서브3를 기록했다. 8.8%, 열 명 중 한 명 가까이가 42.195킬로미터를 3시간 안에 주파한 것이다. 더 놀라운 숫자가 있다.
이 가운데 752명이 생애 처음으로 서브3를 달성한 '신규 명예의 전당' 입성자다. 서브3 러너의 40%가 올해 처음 그 벽을 넘었다는 뜻이다. 아마추어 마라토너에게 서브3는 꿈의 기록이다. 나 같은 40대 러너가 버킷 리스트에 넣어둔 꿈을, 20대와 30대 청년들이 거침없이 넘어서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젊은 러너들이 대거 마라톤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옛날 러너들과 달리 과학적이고 집약적인 훈련으로 단기간에 기록을 끌어올린다. 스포츠 스마트 워치로 심박 존을 관리하고, 유튜브와 러닝 커뮤니티에서 인터벌 프로토콜을 학습하며, 무엇보다 42.195킬로미터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대통령에게도 이 이야기를 전한 적이 있다. 지금 한국의 청년은 그 어느 세대보다 에너지가 높고, 선진국 시민으로 태어나 자란 첫 번째 세대이며, 목표를 향해 전력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마라톤 결승선에서 환호하는 청년들의 이미지와, 통계청이 분류하는 '쉬었음 청년'의 이미지가 도무지 겹치지 않는다. 2026년 1월 기준, 20~30대 '쉬었음' 인구는 76만 명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청년 고용률은 21개월 연속 하락 중이다. 이들이 무기력해서일까? 의욕이 없어서일까?
문제는 청년에게 있지 않다. 달리고 싶은데 도로가 없는 노동시장의 사정 때문이다. AI가 노동시장에 일으킨 변화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일자리 자체의 소멸이 아니다. 청년이 일을 통해 숙련을 쌓을 기회의 소멸이다. 하버드대 연구진이 올해 발표한 논문은 이를 '근속연차 편향적 기술 변화(seniority-biased technological change)'라고 명명했다. 생성형 AI를 도입한 기업에서 신입 채용은 급격히 줄었지만, 경력직 채용은 오히려 늘었다는 것이다. AI가 공격하는 건 경력이 아니라 '신입'이다.
한국도 올해 2월 기준, IT와 전문·과학·기술 서비스업에서 20~30대 취업자가 13만 명 이상 줄었다. 기초 코딩, 자료 조사, 초안 작성 같은 주니어가 하면서 실력을 쌓던 일들을 AI가 가져갔다. 기업 리더의 37%는 신입사원 대신 AI를 쓰고 싶다고 답했고, 인사 담당자의 91%는 신입을 키우는 것보다 경력직을 뽑는 게 효율적이라고 말한다.
청년은 '첫 번째 일'을 경험할 수 없게 되었다. 마라톤으로 치면, 첫 대회에 나가볼 기회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것이 있다. AI를 활용해 자기 분야의 일을 해본 경험,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진짜 경력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런데 대기업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직장에서 AI 활용이란 고작 LLM에 궁금한 것을 몇 가지 쳐보는 수준이다. 이것은 AI 경험이 아니다. 진짜 AI 활용은 도메인 데이터가 있고, GPU 클러스터가 있으며, 엔터프라이즈급 AI 도구가 갖춰진 환경에서 실제 비즈니스 문제를 풀어보는 것이다. 삼성의 SSAFY가 클라우드 서버와 엔비디아 GPU를 지원하며 64개 기업의 실제 프로젝트를 경험하게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인프라는 대기업에만 있다.
결국 새로운 불평등이 등장했다. 경험의 문이 좁아지고 있는 가운데, 대기업 인턴 경험이 있는 청년과, 그렇지 못한 청년 사이의 격차가 과거의 학벌 격차를 대체하고 있다. '일경험의 인프라 격차', AI 시대의 가장 심각한 청년 불평등이다. 정부가 비용을 보조하더라도, 대기업들이 청년에게 일을 겪을 수 있는 자리를 열어야 할 수 있다. 반드시 취업과 연계될 필요는 없다. 지금은 경험 자체가 희소 자원이 되었다. AI가 신입의 단순 업무를 대체하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복잡한 일을 해본 것' 자체의 가치가 치솟았다.
영국은 2017년부터 연간 급여총액이 일정 규모 이상인 기업에 급여의 0.5%를 '도제 부담금'으로 부과한다. 기업은 이 기금으로 청년 훈련을 직접 운영하고, 쓰지 않은 자금의 절반은 중소기업에 이전하여 그쪽의 청년 프로그램도 지원한다. 올해부터는 전일제 도제뿐 아니라 단기 모듈형 과정까지 기금 적용 범위가 확장되었다.
이런 건 어떨까? 대기업이 일정 규모의 청년 일경험 자리를 의무적으로 개방하고, 정부가 비용의 상당 부분을 부담하되, 채용 연계 의무는 부과하지 않는 '산업 도제 기금' 방식이다.
첫째, 대기업의 AI 인프라 데이터, GPU, 엔터프라이즈 도구에 대한 접근권을 청년에게 열어준다. 둘째, 6개월 이상의 충분한 기간 동안 실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한다. 셋째, 프로젝트 참여의 경험이 실제로 유효한, (예를 들어 토큰 같은) 방식의 기록으로 남게 한다. 채용까지 강조하지 않는 것은 당장 시급하기 때문이다.
76만 '쉬었음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용어를 '준비 중 청년'으로 바꿔주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일을 경험할 수 있는 인프라, 즉 도로를 깔아주는 것이다. 이들은 달릴 수 있다. 아니, 이미 달리고 있다. 다만 지금은 달릴 도로가 없어서, 통계 속에 멈춰 서 있을 뿐이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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