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T·바이오 로슈·릴리 1조5000억원 베팅···한국, 빅파마 아시아 R&D 허브로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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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슈·릴리 1조5000억원 베팅···한국, 빅파마 아시아 R&D 허브로 뜬다

등록 2026.03.14 07:13

이병현

  기자

글로벌 임상·오픈 이노베이션 협력 본격화삼성바이오로직스·SK팜테코 등 국내 기업 성장 기대아시아 바이오 혁신 생태계 핵심축 자리매김

그래픽=이한울 기자그래픽=이한울 기자

글로벌 빅파마 로슈와 일라이 릴리가 한국에 향후 5년간 1조5000억원 안팎을 투자하며 국내 제약·바이오 생태계와 밀착 협력에 나섰다. 한국을 단순한 의약품 판매 시장이 아니라 글로벌 임상,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 바이오벤처 육성, 위탁개발생산(CDMO) 협력을 연결하는 아시아 연구개발(R&D) 거점으로 재배치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하는 모습이다.

14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로슈는 향후 5년간 약 7100억원을 투자해 한국과 협력을 확대하고, 일라이 릴리는 5억달러(약 7470억원)를 투입해 국내 바이오 산업 육성과 연구 인프라 강화에 나선다. 두 회사 투자 규모를 합치면 원화 기준 1조5000억원 안팎이다. 글로벌 빅파마가 비슷한 시기에 한국 시장에 이 정도 규모의 자금을 동시에 약속한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투자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한국이 단순 매출 거점이 아닌 전략 자산으로 격상됐다는 점이다. 로슈와 릴리는 공통적으로 한국의 강점으로 세계적 수준의 임상 수행 역량, 상급종합병원을 중심으로 한 촘촘한 의료 인프라, 디지털 기반 의료 시스템, 숙련된 연구 인력을 꼽고 있다. 실제 로슈는 이미 글로벌 임상 10건 중 4건에 한국 연구기관을 참여시킬 만큼 한국을 핵심 파트너로 활용하고 있다.

일라이 릴리의 행보는 더 구체적이다. 릴리는 최근 보건복지부와 '대한민국 제약·바이오 산업 발전 및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올해부터 2030년까지 국내 바이오 혁신 생태계 강화와 글로벌 임상 유치 확대, 연구 환경 조성에 투자하기로 했다. 여기에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손잡고 글로벌 바이오벤처 인큐베이팅 플랫폼인 '릴리 게이트웨이 랩스(Lilly Gateway Labs·LGL)'의 국내 거점을 인천 송도에 설립하기로 하면서 시장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LGL은 단순한 입주 공간이 아니라 릴리의 내부 과학자, 연구진,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유망 바이오텍을 선발하고 멘토링·직간접 투자·공동연구 연계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송도 거점은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제2바이오캠퍼스 내 오픈 이노베이션 센터 'C랩 아웃사이드'에 들어설 예정이며, 양사는 30여개 입주사를 공동으로 선발·육성할 방침이다. 미국 밖 거점이 중국에 이어 한국까지 확장된 것은 릴리가 한국을 아시아 바이오 혁신 협력의 핵심축으로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릴리는 비만치료제 공급망에서도 한국 기업과 협력을 넓히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SK팜테코는 릴리의 차세대 비만치료제 임상 시료 생산을 맡고 있다. 주 1회 투여 제형에서 더 나아간 월 1회 투여 방식의 장기지속형 비만치료제 개발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한국 기업이 생산 파트너로 참여하면서 국내 제조 역량 위상도 함께 부각되고 있다.

로슈 역시 한국 내 협력 폭을 빠르게 넓히고 있다. 로슈는 보건복지부와 '대한민국 바이오헬스 산업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MOU'를 체결하고 다빈도·난치성 질환, 첨단 바이오의약품 분야의 글로벌 임상 유치와 오픈 이노베이션 확대, 연구개발 전문인력 양성에 나서기로 했다. 특히 '한-스위스 바이오패스(BioPath)' 프로그램을 통해 국내 스타트업에 글로벌 멘토링과 스위스 이노베이션 파크 진입 기회를 제공하기로 하면서 한국 바이오벤처의 유럽 진출 교두보도 넓어질 거란 전망이다.

두 회사 전략을 함께 놓고 보면 아시아 내 기능 분담도 선명해진다. 릴리는 중국에는 향후 10년간 30억달러를 투자해 비만·당뇨 치료제 생산 역량을 확대하고, 한국에는 연구개발 협력과 벤처 육성을 강화하는 '투트랙 전략'을 택했다. 중국을 대규모 생산과 시장 대응의 거점으로, 한국을 글로벌 바이오텍과 연결되는 혁신 협력 허브로 활용하는 구조다. 로슈 역시 한국의 임상·연구 역량을 자사 글로벌 네트워크와 결합하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

이 같은 선택의 배경에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도 자리하고 있다. 미국은 최근 의약품 관세와 자국 생산 강화 기조를 이어가고 있고, 유럽은 핵심의약품법과 공급망 자립 정책을 강화하는 중이다. 중국은 혁신신약과 디지털 전환을 앞세워 제약바이오 산업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키우고 있다. 각국이 제약·바이오를 안보와 산업 경쟁력의 문제로 다루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임상 환경과 제조 경쟁력을 동시에 갖춘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커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국내 산업 전반에 미칠 파급효과도 적지 않다. 우선 상급종합병원은 대규모 글로벌 임상 유치를 통해 임상 수익을 확대하고, 최신 치료제 연구 경험과 의료 데이터 축적을 통해 연구중심병원으로서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 글로벌 임상을 수행·관리하는 임상시험수탁기관(CRO)에도 수혜가 예상된다.

공급망 낙수효과는 바이오벤처와 생산기업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비만치료제 생산 협력으로 존재감을 키운 삼성바이오로직스와 SK팜테코를 넘어서 ADC, 이중항체, 약물전달 플랫폼 등 독자 기술을 가진 바이오텍뿐 아니라 기초 인프라, 분석, AI 신약개발 기업까지 수혜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단순 기술수출이나 위탁생산에 머물던 구조에서 공동연구와 상업화 설계 단계까지 한국 기업의 역할이 확대될 수 있단 전망이다.

글로벌 빅파마 투자에도 남은 과제는 있다. 한국은 임상과 바이오시밀러 분야에서 강점을 보였지만, 혁신신약 개발 역량과 대형 연구개발 투자 규모는 여전히 미국·유럽·중국 선도 기업과 격차가 크다. 원료의약품 공급망의 특정 국가 의존도도 높다. 미국의 제232조 의약품 관세 리스크까지 더해지면 대미 수출 구조 다변화와 공급망 대응 전략도 시급해질 수밖에 없다.

시장에서는 이번 투자를 계기로 병원·CRO·CDMO·바이오벤처를 잇는 국내 생태계 전반의 체급이 올라가고, 한국이 아시아를 대표하는 바이오 R&D 허브로 자리매김하는 분수령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의 기술력은 충분히 경쟁력이 있는 상황인 게 나타난 셈"이라면서 "국내 기업이 글로벌 시장과 접점이 커진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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