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준법 경영, 선택 아닌 생존 전략의 시대

오피니언 데스크 칼럼 서승범의 유통기안

준법 경영, 선택 아닌 생존 전략의 시대

등록 2026.02.25 11:12

수정 2026.02.25 11:18

서승범

  기자

reporter
최근 유통·식품업계를 겨냥한 사정 당국의 칼날이 매섭다. 공정거래위원회와 국세청 조사에서 담합, 리베이트, 탈세 혐의가 잇따라 드러났고 적게는 수백억 원에서 많게는 수천억 원에 이르는 과징금과 추징금이 부과되고 있다. 기업들로선 그야말로 '벌금 고지서 폭탄'이다.

문제는 시점이다. 경기 침체와 소비 위축, 고환율과 원가 급등이라는 삼중고 속에서 업황은 이미 흔들리고 있다. 기업들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항변한다. 과도한 제재는 투자 위축과 고용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도 곁들인다. 사정 당국의 강경 기조가 자칫 기업 활동 전반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다.

그러나 시장의 시선은 냉랭하다. 실적 악화를 외부 환경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준법 의식의 균열이 반복돼 온 전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국민적 공분을 산 밀가루 담합 사건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국내 주요 제분사들은 2006년에도 수년간 공급 물량과 가격을 담합한 혐의로 검찰에 고발된 바 있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온 고질적 병폐가 또다시 드러난 셈이다.

기업들은 과징금 규모가 과거보다 크게 늘었다며 부담을 토로한다. 하지만 본질은 액수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과징금과 추징금은 일회성 비용으로 회계 처리할 수 있지만 신뢰 훼손은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손실을 남긴다. 소비자와 투자자, 협력사가 등을 돌리는 순간 기업의 존속 기반 자체가 흔들린다.

해외 사례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배출가스 조작, 이른바 '디젤게이트' 이후 시장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 폭스바겐, 회계 부정으로 한때 통신업계의 거인이던 월드컴이 파산에 이른 사례, 분식회계로 일본 제조업의 상징에서 추락한 도시바의 몰락은 '준법 경영 리스크'가 곧 '기업 존속 리스크'로 직결되는 시대임을 말해준다. 한 번 무너진 평판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도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이제 기업에 준법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 조건이다. 선언적 구호로는 부족하다. 임원 인사 평가에 '법 위반 리스크' 감점제를 명문화하고 중대한 위반이 발생할 경우 성과급 환수와 징계를 제도화해야 한다. 내부 고발 시스템을 실질적으로 작동하게 하고 외부 독립 감사 기능을 강화하는 것도 방법이다. 법무·컴플라이언스 부서를 비용 센터가 아닌 리스크 관리의 핵심 축으로 재정립해야 한다.

정부 역시 일관된 법 집행과 예측 가능한 규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나쁜 관행에 대해선 선제적으로 차단하되, 기업의 존속 기반을 뿌리째 흔드는 과도한 제재는 경계해야 한다. 도덕적 해이를 저질러도 이익이 남는 구조를 방치한다면 악습은 반복될 수밖에 없지만 제재의 목적은 응징이 아니라 시장 질서의 회복이어야 한다.

과징금 수천억 원보다 더 무서운 것은 보이지 않는 '신뢰 상실'이라는 벌금이다. 신뢰는 쌓는 데 수십 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데는 한순간이면 충분하다. 더 큰 대가를 치르기 전에 스스로를 바로 세우는 일, 그것이 지금 기업들에 주어진 가장 현실적인 생존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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