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달라졌던 것 같다. 배우들을 인터뷰하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대답이 그랬다. 우선 질문은 이렇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캐릭터는 무엇인가.’ 이어지는 대답은 ‘대동소이’와 ‘이구동성’이다. “악랄한 악역을 한 번 해보고 싶다.”
영화의 스토리는 장르 불문하고 대부분 한 줄로 요약 가능하다. 선악 대결이다. 인류 최초의 선악 대결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덴동산 얘기다. 여기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하는 ‘뱀’은 인류 최초의 악역인 셈이다. 수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수많은 스토리는 악을 발전시켜왔고 진화시켰다.
최근들어 악의 개념은 영화 속에서 더욱 진화되고 있다. 때로는 주인공의 선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등장한다. 스토리 자체의 부차적인 캐릭터에서 극의 긴장감을 극대화하거나 스스로 주인공이 돼 영화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존재로 한 단계 발돋움한다. 최근 개봉해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영화 ‘감시자들’ 속 정우성이 데뷔 14년 만에 악역에 도전한 것 역시 ‘스토리 속 악’의 매력을 느꼈기 때문은 아닐까. 역대 한국영화 흥행작 속 절대악의 존재감을 짚어봤다.
◆ “사람이 사람 죽이는 데 이유가 있냐?”
2002년 ‘충무로 대장’ 강우석 감독은 한 편의 영화를 들고 감독으로 복귀했다. 오랜 제작자 생활에서 다시금 현장으로 복귀하면서 들고 나온 영화는 ‘공공의 적’이란 제목의 형사물이었다. 주인공은 당시 떠오르는 충무로 흥행 블루칩 설경구였다. 그 대척점에 선 인물이 바로 이성재다. 이성재는 당시만 해도 큰 주목을 끄는 인물은 아니었다. ‘공공의 적’ 출연 전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등 굵직한 흥행작이 있었지만, 코믹스러운 느낌이 강했다. 더욱이 고소영과 함께 찍은 ‘하루’란 멜로드라마에서의 가슴 절절한 연기가 화제를 모으던 시기였다.
하지만 ‘공공의 적’이 개봉한 뒤 설경구의 강렬한 연기가 화제를 모았지만 정작 진짜 주목을 받았던 배우는 이성재였다. 유약한 듯한 증권가 애널스트인 조규환(이성재)은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부모들을 무참히 칼로 살해하는 패륜적인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자신의 부모가 살해된 현장을 찾아 밀가루를 뿌리며 증거를 지우는 모습에선 인간의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의 모습으로 돌변했다. 여기에 경찰서에서의 진술을 위해 우는 모습을 연기하거나 샤워를 하면서 자위를 하는 등의 비상식적인 모습은 ‘절대악이란 바로 이런 것’이란 사실을 강조하듯 거침없었다.
특히 강철중(설경구)과의 경찰서 취조실에서 보인 명대사는 섬뜩함을 넘어 현재 우리 사회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이른바 ‘묻지마 범죄’의 발생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인 듯 늦게 토해낸다. “사람이 사람 죽이는데 이유가 있냐?”
한국영화 사이코패스 캐릭터의 시작점으로 볼 수 있는 영화 속 인물이다. 이성재는 이 영화로 인해 한때 자신의 실제 아버지와 관계가 서먹서먹해 졌다는 에피소드도 있단다.
◆ “이 양반 몰라도 한 참을 모르시네”
2005년 개봉한 김지운 감독의 영화 ‘달콤한 인생’은 하드보일드 액션이란 조금은 낯선 장르의 영화였다. 무미건조한 화법과 배우들의 생경한 연기, 여기에 액션 장르에 어울리지 않는 암축적 대사 등 영화 전체의 이른바 ‘톤 앤 매너’가 기존 한국 영화의 장르 테두리에선 이질적인 느낌이 강했다.
‘달콤한 인생’이 흥행면에서도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냈고, 주인공 이병헌의 아우라와 김영철의 중후한 보스 연기, 여기에 신민아의 모호한 매력과 김뢰하 진구의 존재감 넘치는 연기 나아가 김지운 감독의 스타일리시한 스타일을 엿볼 수 있기에 장르적인 관점에서 분명히 넘겨짚고 가야할 영화로 기억된다.
하지만 개봉 당시와 지금까지도 이 영화로 인해 회자되고 있는 캐릭터는 엉뚱하게도 배우 황정민이 맡은 백사장이다. 특별출연 형식으로 등장한 그는 이 영화에서 불과 10여분에 불과한 출연 분량을 갖는다. 그럼에도 그가 보인 임팩트는 상당했다.
우선 한 쪽 뺨에 선명하게 그어진 상처와 능글거리는 말투에 팔자걸음, 그리고 무엇보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성격은 실제 배우 황정민의 그것으로 착각하게 만들 정도다. 놀라운 점은 이 영화로 배우 황정민이 연기 생활 처음 악역에 도전했단 사실이다.
황정민은 당시 인터뷰에서 “롤랑 조페 감독의 ‘시티 오브 조이’에서 어린 여자아이의 입을 칼로 찢는 장면에서 받았던 충격을 떠올려 입가의 흉터를 설정했다”면서 “바다의 난폭자 백상어 이미지를 떠올리게 겉모습을 만들어 나갔다”고 전했다.
영화 속에서 피범벅이 된 주인공 선우(이병헌)를 향해 “이 양반 몰라도 한 참을 모르시네”라며 서늘하게 웃는 황정민의 얼굴을 기억하면서 전도연과 함께 출연한 ‘너는 내 운명’의 순박한 청년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과연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일까?
◆ 싸이코패스 연기 양대산맥 ‘하정우’ vs ‘최민식’
연쇄살인마 유영철이 경찰에 검거되기 전 ‘싸이코패스’란 단어는 일반에겐 극히 생소한 단어였다. 사회적 파장은 엄청났다. 물론 사회적 관심은 영화란 매체로 이어졌다. 유영철 사건을 모티브로 탄생한 영화가 바로 2008년 개봉한 ‘추격자’와 2010년 개봉한 ‘악마를 보았다’다. 두 편 모두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가 주인공이다.
먼저 ‘추격자’의 경우 유영철 사건이 직접적인 모티브로 작용해 탄생됐다. 극중 유영철에 해당하는 지영민이란 캐릭터는 지금은 대세 배우로 자리잡은 하정우가 연기했다. 당시 워낙 충격적인 내용을 담은 탓에 여러 배우가 출연을 고심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결국 하정우의 손에 들어간 ‘추격자’의 지영민 캐릭터는 전대미문의 악역으로 태어났다. 여성의 머리를 망치로 내리치며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의 연기는 실제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의 사실적인 느낌을 줬다. 파출소 장면에서 심드렁하게 웃으며 “죽였어요”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장면 가운데 하나다.
영화 출연 뒤 하정우는 한 동안 지영민 캐릭터로 인해 여러 불편함을 감수했단 에피소드를 전하기도 했다. 팬들 하다못해 지인들과의 만남에서도 다들 자신과 거리를 두려하는 모습에 남모를 스트레스까지 받았다고 한다. 바꿔말하면 그만큼 하정우의 연기가 사실적이었단 말로 풀어볼 수 있다.
비슷한 소재의 영화로 ‘악마를 보았다’가 있다. 영화 제목처럼 주인공 수현(이병헌)이 악마를 능가하는 살인마 장경철(최민식)에게 애인을 잃고 복수를 하는 내용이다. 워낙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어 기획단계부터 여러 루머가 전해졌다. 신체훼손, 인육 먹기 등 상상을 초월한 표현 방식에 출연이 거론된 배우들이 난색을 표하기도 했단다. 결국 연기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민식이 장경철로 출연하게 된다. 최민식은 인터뷰에서 “나 역시 출연이 망설여 질 정도로 거북한 장면이 많았다”면서도 “이 정도로 악한 인물이 너무도 통쾌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며 출연 결정 이유를 전했다.
극중 수현의 애인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에서 “왜”라며 심드렁하게 묻는 최민식의 표정을 기억하는 가. 최민식이란 배우의 스펙트럼이 궁금하다면 꼭 관람을 추천한다.
◆ 악역도 악역 나름?···정우성의 스타일리시 악역론
정우성은 ‘감시자들’이란 영화로 데뷔 첫 악역에 도전했다. ‘가만히 서 있어도 화보’로 불리는 정우성의 아우라는 배우로선 장점도 되지만 약점도 분명하게 만들었다. 캐릭터를 만들어 내는 데 운신의 폭을 그만큼 좁혀 버리는 장애물이 됐다. 그 역시 처음 이 영화 출연을 결정했을 때 자신의 그런 느낌을 간파한 제작진이 예상 가능한 제안을 했었다고.
정우성은 “내가 맡은 제임스란 인물의 분량을 늘리자고 하더라”면서 “제임스는 주인공도 아니고 착한 사람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범죄자다. 그런 사람에게 이유를 부여할 수는 없었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가 개봉된 뒤 ‘제임스’에 대한 매력은 영화팬들을 즉각 흥분케 했다. 극중 정우성은 몇 마디 대사도 하지 않는다. 눈빛과 몸으로만 말을 했다. 황반장(설경구)과 하윤주(한효주)의 추격을 따돌리며 그림자처럼 움직일 따름이다. 다른 악역들이 그러하겠지만 앞뒤 설명이 전혀 없는 캐릭터다.
결국 정우성은 제임스의 과거를 스스로 정리해가면서 영화 속 캐릭터를 완성해 나갔다. 특히 자신의 장기 중 하나인 액션에 올인하며 덤벼들었단 정우성의 자세는 ‘감시자들’의 흥행과 관전 포인트 가운데 하나다. 극중 최고 명장면인 골목격투신은 ‘정통’(김병옥)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직전하는 이른바 수평 액션의 백미. 마지막 정통과 마주한 채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흉기를 휘두르는 정우성의 눈빛은 우리가 기억하는 정우성이 절대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우성은 영화가 끝난 뒤 ‘제임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과연 제임스를 악역이라고 해야 하나. 아직도 난 의문이 든다.” 그렇다. 정우성이 하면 악역도 악역이 아니게 된다. 그게 바로 정우성의 스타일리시 악역론의 실체다.
김재범 기자 cine517@
뉴스웨이 김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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