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프로골퍼의 전설이 된 구옥희

[안성찬의 골프이야기]여자프로골퍼의 전설이 된 구옥희

등록 2013.07.14 09:05

수정 2013.07.17 07:49

안성찬

  기자

지난해 롯데마트 여자오픈에 출전한 구옥희가 티샷을 하고 있다. ⓒKLPGA 박준석 포토지난해 롯데마트 여자오픈에 출전한 구옥희가 티샷을 하고 있다. ⓒKLPGA 박준석 포토

구옥희구옥희

시니어투어에 출전해 샷을 하는 구옥희.시니어투어에 출전해 샷을 하는 구옥희.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 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이다. 오늘 이 시가 생각나는 것은 여자프로골퍼 구옥희(1956~2013년) 때문이다.

그는 이제 고인이 됐다. 쓸쓸히 일본에서 홀로 지난 10일 하늘나라로 간 것이다. 사인은 심장마비다. 그는 참으로 외로웠을 것이다. 올해로 57세다. 미혼. 오직 골프만 바라보고 한평생을 살았다. 물론 누구나 다 죽는다. 시간차이만 있을 뿐. 그런데 그의 죽음으로 참으로 안타깝다.

구옥희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의 선구자다. 그는 1978년 프로테스트를 거쳐 강춘자(1956~), 한명현(1954~2012년), 안종현(1956~1982)과 함께 국내 여자프로 1기생이 됐다. 안종현이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먼저 세상을 등졌고 지난해 한명현도 우리와 이별했다.

사실 프로골퍼의 죽음은 허무하다. 그들이 골프사에 남긴 업적에 비해 대우를 받지 못한다. 한국프로골퍼 1호인 연덕춘 옹(1916~2004년)이 그랬다. 17세에 골프를 배운 그는 1935년 프로골퍼 자격을 획득하고 일제 강점기(1910~194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1941년 일본오픈에서 우승한 골프영웅이다.

그런데 그의 장례식에는 겨우 조화 몇 개가 전부였다. 조문을 한 프로골퍼 후배들도 몇 명 되지 않았다. 그의 명성에 비해 정말 초라한 장례식이었다.

박세리나 박인비 등이 출현해 한국골프를 전세계에 알리고 위상을 드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과 미국을 개척한 여자프로는 구옥희다. 여자프로골퍼 중에 일본과 미국에서 처음 우승한 것도 구옥희다.

구옥희의 부친은 고향이 충남 서산. 한의사였다. 집안은 경기도 연천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구옥희가 태어났다. 부친은 중학교때 돌아가셨다. 위로 오빠가 셋이다. 연천여고 졸업후 경기도 고양으로 이사했다. 이곳의 123퍼블릭코스에서 캐디를 하면서 골프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서울시청뒤 무교연습장에서 민영국 프로에게 골프지도를 받았다. 키 162cm의 구옥희는 여고시절 투포환 등 육상선수를 지낸 덕으로 체력이 남달랐다.

남서울CC로 옮겨 아시아의 골프 1인자였던 1972년 일본오픈 챔피언 한장상(1940~)에게 제대로 골프를 배웠다. 그는 페이드볼을 잘 친다. 드라이버 거리는 240야드를 날렸다.

프로가 되자마자 국내 KLPGA 선수권대회에서 2위를 했고 이듬해 쾌남오픈에서 첫승을 거뒀다. 이후 1980년 5승, 1981년 4승 등 국내 투어에서 20승을 올렸다.

국내에서 1인자로 군림하던 그는 재일교포의 도움으로 1983년 일본에 진출, 프로테스트에서 수석 합격했다. 1984년은 무승. 1985년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3승을 올린 그는 2005년까지 통산 23승을 거뒀다.

이 기간 동안 일본 골프계에서는 ‘구옥희 신드롬’을 일으켰다. 일본매스컴을 뜨겁게 달궜다. 1988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인 스탠다드 레지스터 핑 클래식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했다.

구옥희의 별명은 ‘쿠키’. 일본과 7년간 활약한 미국에서는 ‘쿠기 스마일’로 유명세를 탔다. 그가 아직 우리 곁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은 그녀의 선한 눈웃음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안성찬 골프전문대기자 golf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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