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배상문(27·캘러웨이)과 이일희(25·볼빅). 둘 다 미국에서 첫 승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둘다 이면을 들여다보면 겉보기와 다르게 남모르는 고통과 고난의 시간이 있었다.
아빠없이 홀어머니밑에 자란 배상문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HP 바이런 넬슨 클래식에서 정상을 차지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배상문.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실 국내에서 메이저급 대회만 우승하면서 2008년, 2009년 상금왕, 일본무대에서 3승을 거두며 2011년 상금왕. 이것만 놓고 보면 유복한 가정에서 제대로 골프를 배웠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정 반대다.
어머니 시옥희씨(57)는 결혼식도 못 올리고 남자 만나서 배상문을 낳았다. 대구에서. 통증이 찾아와 밤 12시에 병원을 찾았고 다음날 아들을 순산했다.
음력으로 1986년 5월15일(양력 6월21일)이다. 그리고 소위 아빠라는 그 남자는 아이 낳고 6개월이나 지나서 말없이 집을 나갔다.
이후 배상문이 초등학교 2년 때 처음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시옥희씨가 우연히 길을 가다가 만난 것이다. 약속을 해놓고 상문이게는 남자친구라 소개했다.
그러자 배상문은 엄마의 귀에 대고 “아빠지?”라고 물었다. 핏줄은 못 속이나 보다. 이전까지는 시씨는 배상문에게 줄곧 “아빠는 죽었다”고 말했던 것. 그리고 그 남자는 또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홀로 아이를 키운다는 것, 생각보다 쉽지가 않아요. 피눈물을 흘릴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눈물을 달고 살았으니까요. 죽으려고 아파트 16층까지 올라갔다가 애(배상문)때문에 그러지도 못했지요.”(시옥희씨)
나고야에 있는 이모 친구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사찰을 운영하는 분의 도움을 받게 될 줄이야. 이것이 배상문의 운명을 바꿔 놨다.
시씨는 하소연을 넋두리처럼 털어 놨다. 인생이 이렇게 박복할 수가 있을까하는 한탄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그 귀인은 선뜻 생활비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당시에 71세 노인이셨는데 지금은 고인이 됐다.
이후 시씨는 10년간 그분의 도움을 받았다. 덕분에 골프도 배웠다. 연습장에 상문이를 처음 데려간 것은 6살 때. 그리고 배상문은 1년 뒤에 클럽을 처음 잡았다.
대구서 살다가 서울로 집을 옮겼다. 배상문은 클럽을 놓았고. 시씨는 1998년 사기결혼을 당하고 나서 다시 대구로 내려왔다. 배상문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다시 클럽을 잡았고, 중 2때 우승을 3번이나 했다.
배상문이 2부투어 시절 귀인의 도움이 끊겼다. 그동안 모았던 반지, 시계 등등 모두 팔아 뒷바라지를 했다. 시씨는 캐디로 나서면서 아들에게 정성을 쏟았다.
이것이 먹힌 것일까. 정규투어 시드전에서 6위로 합격했고, 2006년 에머슨퍼시픽오픈에서 우승했다. 미국진출과 함께 배상문은 캘러웨이골프 본사로부터 스폰을 받았고, 미국에서 2년차를 보내고 있다.
“눈물로 지새운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이일희
이일희는 폭우로 인해 미니대회로 치러진 퓨어실크-바하마 클래식에서 우승했다. 국내외 투어에서 생애 첫 승이다. 배상문과 달리 가정은 유복하다. 하지만 그도 아픔이 적지 않다.
아버지의 ‘맛있는 짜장면 사줄게’라는 꼬임(?)에 빠져 주말마다 골프연습장에 간 것이 골프입문계기.
2006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첫 해부터 리더보드 상단을 차지하며 차기 유망주로 뽑혔다. 그러나 동료들이 우승하는 사이 그만 우승을 못했다. 동아회원권을 만나기전에는 뚜렷한 스폰서도 없었다. 미국으로 눈을 돌렸다.
이일희는 “투어프로가 되고 많은 선수들을 보면서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미국 진출을 준비하는데 주위의 반대가 심했지만 기왕 놀려면 큰 물에서 꿈을 펼치라며 아빠가 밀어 주셨다”고 말했다.
2009년 퀄리파잉 스쿨 1차전이 끝나고 난 후 그는 아버지와 대중교통만 이용했다. 밥도 숙소에서 해 먹었다. 독기를 품고 도전했다. LPGA투어 입성도 만만치는 않았다. 퀄리파잉 스쿨 마지막 날 공동 20위, 케노(미국)와 연장전에 나섰다. 마지막 홀에서 버디를 잡아 겨우 조건부 시드를 받았다. 미국 투어에 진출했지만 오히려 출전대회는 줄었다.
경비를 줄이기 위해 제일 싼 이코노미 클래스 티켓을 구입해 혼자 비행기를 탔다. 대회 조직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호텔 대신 하우징을 했다. 하우징이란 대회장 근처 빈 방이 있는 가정집을 모집해 선수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것으로 이용하는 외국선수들은 많지만, 당시 한국 선수로는 이일희가 유일했다.
항공편도 스스로 해결했다. 이동할 때도 캐디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다음 대회 코스가 가까우면 주변선수들의 차를 얻어 타고 다니기도 했다.
2010년 기아클래식을 통해 꿈의 무대인 LPGA정규 투어에 입성, 67위의 성적으로 해당 경기를 마쳤다. 그러나 이후 연속 7개 대회를 컷오프되며 눈물로 밤을 지샌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미국 경기가 끝나면 그날 저녁 비행기를 타고 귀국해 한국 투어에 출전했다. 경기 감각 및 KLPGA시드권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미국 투어에 필요한 자금도 마련해야 했고.
이때 얻은 별명이 ‘독립군’이다. 스폰서가 없었던 탓이다. 성적도 안나는데 누가 스폰서를 하겠는가.
고된 LPGA투어 생활에 지쳐 이일희는 중간에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마음 먹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워 미국 투어 생활을 지속하기에는 곤란했다. 많이 외롭고 지쳐 있었다.
미국 투어의 성적도 초라했다.
한국 복귀를 마음 먹고 KLPGA 시드전을 치뤘지만 선발전에서 낙방했다.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다시 갔다. 그야말로 벼랑 끝에 몰렸다. 이때 만난 것이 볼빅의 문경안 회장이다. 후원 계약을 맺으며 기사회생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볼빅볼로 우승했다.
안성찬 골프대기자 golfahn@

뉴스웨이 안성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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