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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金’ 중 홀로 대권 못차지한 김종필···쿠데타에서 민주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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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의 주역으로 이름 날려···민주화 운동 통해 정계 복귀
박정희·노태우·김영삼·김대중 거치며 ‘영원한 2인자’로 남아
충청권에서 거물급 정치인으로 영향···‘충청 대망론’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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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시절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별세하면서 그의 족적이 주목받고 있다. 쿠데타의 주역으로 정치계에 입문했지만 문제를 일으키며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민주화 운동으로 정치계에 다시 복귀한 독특한 이력을 소유했다.

김 전 총리는 1926년 1월7일 충남 부여군에서 아버지 김상배씨와 어머니 이정훈씨 사이 7남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는 공주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사범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정계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지난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서다. 박정희 정권의 2인자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그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가장 주요한 업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것이다. 이는 훗날 국정원이 된다. 그는 초대 중앙정보부장이 돼서 온갖 인권탄압과 공작정치, 정보정치 등을 일삼았다. 이때 모든 민간 정치인들을 정치규제로 묶어놓은 상태에서 비밀리에 민주공화당을 사전에 조직하면서 정치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4대 의혹사건’으로 인해 물러난다.

4대 의혹사건은 증권 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 자동차 사건 및 파친코 사건 등이다. 당시 이들 사건은 사회에 큰 충격을 던지면서 정권 내부의 권력다툼을 불러일으켰다. 김 전 총리는 해외행을 택했지만, 곧 귀국해 그해 치러진 6대 총선에서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된 뒤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그러나 한-일 국교정상화회담의 쟁점이던 대일청구권 문제와 관련한 일명 ‘김-오히라 메모’로 굴욕외교를 비판하는 6.3시위가 일어났고, 시국수습책의 하나로 1964년에 다시 해외로 간다. 여전히 대일청구권 문제는 ‘헐값에 피해자들을 팔았다’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김 전 총리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려 재산을 압류당하고 일체의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1984년 미국으로 떠났다가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던 1986년 귀국해 13대 총선을 앞두고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1987년 치러진 13대 총선에서는 충청권을 기반으로 35석 의원을 당선시키면서 정치에 복귀했다.

지난 1987년에는 13대 대선에 출마했고, 1990년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3당 합당에 참여해 민자당의 한축이 됐다. 이어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를 지원해 여권의 2인자역을 고수했다. 언제나 그의 역할은 ‘킹메이커’ 혹은 ‘2인자’였다.

그리곤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이념적으로 거리를 뒀던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손을 잡는 일명 ‘DJP 연합’을 이룬다. 김대중 총재가 당선될 경우 김종필 자민련 총재를 초대 국무총리로 한다는 내용이 주된 것이었다. 결국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 이후 국민의정부에서 초대 국무총리를 맡게 됐다.

하지만 김 전 총리는 내각제 개헌을 주장했고, 이를 받아주지 않고 대북관계에 대한 이견이 심해지자 김대중 대통령과 갈등을 겪었다. 이후 자신이 이끄는 자민련이 선거에서 번번히 참패를 거듭했다. 결국, 2004년 열린 17대 총선에서 참패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뒷선에서 충청권의 표심을 이끄는 거물급 보수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을 지지하기도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충청도가 선택한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는 ‘충청 대망론’을 말이 나오기도 했다.

김 전 총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3김’으로 불렸다. 3김 시대에서는 그도 두 사람 못지않은 영향력을 갖고 있었지만, 결국 유일하게 대통령을 해보지 못했다. 매번 2인자였던 그의 정치인생은 험난하기만 했다.

임대현 기자 xpress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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