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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저만 가야 하는 민방위훈련

[기고]흙수저만 가야 하는 민방위훈련

등록 2015.12.17 09:00

이창희

  기자

한국입법정책학회 이사 이경선

흙수저만 가야 하는 민방위훈련 기사의 사진

민방위훈련에 동원되는 대상자들에게 식비나 교통비를 지급하자는 내용의 민방위기본법 개정안이 지난달 23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 안건(대표발의 신계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으로 상정됐다. 그런데 이에 대해 기획재정부가 반대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기재부 측의 사전검토 자료에 따르면,‘본인이 응하는 시기를 선택할 수 있고, 1일 4시간 내에서 훈련이 이뤄지거나 간단한 소집점검을 하는 정도’에 불과하고‘이 정도의 민방위훈련은 남북대치 상황에서 국민이 부담해야할 최소한의 국방의 의무’라며‘실비 지급 필요성이 낮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또 기재부는 또 ‘하루 4시간 소집점검훈련을 받는 예비군이나 주소지 인근에서 향방작계훈련을 받는 예비군에게도 식비나 교통비를 지급하지 않는데 민방위대원에게만 식비나 교통비를 지급할 수는 없다’며 형평성 논리를 거론하고 있다. ‘추가 재정 소요시 70%는 지방자치단체가 책임질 부분이므로 이는 지방자치단체에 과도한 재정 부담을 준다’고 까지 적시하며 민방위제도가 마치 원칙적으로 지자체가 알아서 해야 할 사무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앞에서는 국민이 국토방위를 위해 부담해야할 최소한의 국방의 의무라면서 뒤에서는 지방자치 사무라고 떠넘기는 것은 모순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기재부 측 입장엔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난다. 우선 훈련에 응할 시기를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편의를 부여한 것은 맞지만, 훈련은 엄연히 의무사항이고 불참할 경우 부담스런 행정벌이 부과되며 하루 4시간 훈련이든 소집점검이든 이를 위해 채비를 하고 전후로 이동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실상 개인마다 6~7시간 내외가 소요된다. 사람의 생활상을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보는 기재부의 인식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또 국민이 마땅히 부담해야할 국방의 의무라고 해서 그에 응하기 위한 비용까지 국민이 떠맡아야 한다는 논리는 권위주의적 인식의 잔재이며 전근대적 관료행정의 극치로 읽혀질 만하다. 일반 국민은 훈련을 받으면서 노동이나 영업 중단에 따른 경제손실, 학업손실, 여가손실, 사회활동 중단에 따른 관계손실 등 다양한 형태의 기회비용을 잃고 있다. 이런 손실에 대한 보상은 논외로 치더라도 교통비나 식비 정도는 국가가 오히려 적극 나서서 지원해주려는 자세가 정상적인 게 아닌가 싶다.

통상 형평성 원리는 누구는 혜택을 받는데 또 다른 누군가가 혜택을 받지 못할 때 그 차별성을 해소하려는 취지로 제기되는 논거다. 헌데 예비군도 실비 보상을 제대로 못 받고 있으니 민방위도 혜택을 줄 수 없다는 것은 차별의 합리화, 피해감수의 정당화, 아전인수식 궤변이 아닐 수 없다. 훈련강도의 세기 또한 훈련대상자가 선택할 수 없고 훈련을 주관하는 지자체나 부처가 결정하는 사항이다. 그럼에도 훈련강도가 낮으니 실비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은 ‘권한 있는 곳에 책임 있다’는 원리에 어긋나며 과도한 논리적 비약이다.

국민안전처는 민방위훈련 대원 370만 명에게 연간 1인당 1만원씩 지급하는 것을 기준으로 370억 원의 예산이 소요되는 것으로 추계했는데, 기재부는 이것이 국가재정 여건상 매우 부담스럽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단 교통비는 6000원 수준으로, 식비와 간식비는 4000원 선으로 책정해 시작하는 것이 적절해 보이고, 이조차도 소요되는 훈련시간이나 훈련강도 그리고 이동거리(교통소요시간) 등을 감안해 차등 지급하는 것이므로 실질적으로는 200억원 내외에서 민방위대원에 대한 실비지원제 시행이 가능해 보인다. 국민안전처도 재정여건에 맞춰 지급대상과 지급항목을 조정하면서 지급한다면 소요되는 재정이 그다지 크게 부담스러운 수준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오히려 민방위 대원에게 실비를 지급함으로써 훈련의 참여의지를 제고하고 훈련이 있는 날마다 다소간이나마 주변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데 긍정적 효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민방위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의미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도 ‘관(官)’은 국민은 언제든 동원할 수 있고 소모될 수 있는 부역자원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스럽다. 공무원은 2시간 관외출장만 나가도 몇 만원의 출장비가 지급되고 공무휴가까지 내며 하루 쉴 수 있다. 반면 일반 국민은 생업에 종사하다가 훈련까지 받는다.

헌법적 근거도 미약한 상황에서 희생만을 강요하는 예비군 제도와 민방위제 개선의 근본적인 공론화가 필요해 보인다. 무엇보다 예비군과 민방위 제도가 헌법 제39조제1항이 말하는 국방의 의무에 근거를 둔 것이라면, 제2항에 명시된 ‘누구든지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는 헌법규범은 도대체 어디로 실종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방산비리 문제로 해마다 수백억 원의 혈세가 곳곳에서 누수되고 있는 사실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민방위훈련 실비 지급 예산 370억원은 과연 과잉이고 포퓰리즘일가. 민방위훈련 불참자에게 벌금을 징수하고 있고 이 벌금은 국고로 귀속되고 있는데 액수가 비록 적을지라도 이를 당연히 민방위대원 복지에 우선 쓰이도록 환류시켜야 할 것이다.

민방위훈련 제도를 유지함으로써 국가가 얻는 국방비 절감 효과나 안보력 강화 효과가 수십 수백조원은 된다. 이를 염두해 보면 실비를 지급하느냐 마느냐는 사실 쟁점거리도 될 수 없다. 오히려 실비 지급을 얼마나 해줄 것이냐가 쟁점이 되는 것이 정상적인 당국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작은 실비라도 개인에게 부담하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에게는 작은 비용도 크나큰 경제적 심리적 고통일 수 있다. 평상시라 훈련받는 것이지, 전시거나 비상 상황에서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다. 금수저 자식들은 군면제 예비군면제 민방위면제를 이어지지만, 서민 흙수저 자식들은 차비를 줘야할지 말지 거지 취급당하며 중년이 되도록 국방의 의무를 떠맡고 있다.

6·25전쟁이 일어난 이승만 정권 당시 수십만명의 국민을 동원해 놓고 총은커녕 밥도 제대로 주지 않고 행군만 시키며 굶겨 죽인 희대의 비극인 ‘국민방위군 아사 사건’이 문득 떠오른다.

뉴스웨이 이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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