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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민 “‘방황하는 칼날’ 시나리오도 안보고 출연 결정”

[인터뷰] 이성민 “‘방황하는 칼날’ 시나리오도 안보고 출연 결정”

등록 2014.04.17 15:12

김재범

  기자

사진 = 이수길 기자사진 = 이수길 기자

배우 이성민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연민이 느껴진다. 드라마 ‘파스타’에서 보여준 얄미운 캐릭터도, ‘글든타임’에서 보여준 카리스마 의사 선생님도 모두 이성민이 연기하면 기본적으로 연민이란 감정이 들어갔다. 어떤 이는 ‘생활형 연기’라고 하고 어떤 이는 ‘메소드’라고 극찬한다. 하지만 뭐가 된들 어떠랴. 이성민이 연기를 하면 선역이든 악역이든 그건 그냥 ‘이성민’이 해석한 새로운 범주의 캐릭터가 되고 만다. 오죽하면 충무로에서 내로라하는 연기파 배우들이 함께 하고 싶은 동료 1순위로 그를 주저 없이 꼽는다고 했던가. 영화 ‘방황하는 칼날’ 캐스팅 당시 정재영이 이성민의 캐스팅 사실에 주저함 없이 출연을 결정했다는 것만 봐도 안다. 이제 이성민이 연기하면 분명한 캐릭터의 분명한 이유가 보인다. 그 이유는 영화 속 주제와 정확하게 한 선에 놓여 있다. 그래서 ‘방황하는 칼날’이 묵직하게 가슴이 저린 이유다.

개봉 전 이성민과 만난 자리에서 우선 놀라기부터 했다. 데뷔 27년 만에 첫 주연이었다. 사실 놀라운 점도 아닌데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동안 그가 출연했던 드라마가 한 두 편이 아니었고, 그 안에서 이성민의 존재감은 만인이 인정한 것 아닌가. 첫 주연이란다. 그런데.

사진 = 이수길 기자사진 = 이수길 기자

“단역만 몇 편이고 조연만 몇 년인데(웃음). 사실 이 영화 포스터가 나오고 첫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죠. 얼굴이 화끈거려서(웃음). 어휴, 정말 창피하기도 하고. 난 아직도 그냥 내 자리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좀 그래요. 뭐, 여러 선배들이 그러셨잖아요. 배역에 귀천이 어디 있냐고. 그렇죠 단역이나 조연이나 주연이나 다 자기 몫이 있고, 그래서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거고. 우선 이번 영화도 평이 다행히 좋아요. 출연한 모든 배우들의 공 아니겠어요.”

워낙 호탕한 성격이고, 낯을 가리지 않아 시원시원했다. 이번 영화 자체가 워낙 무겁고 주제도 어두워서 쉽지 않은 인터뷰가 될 듯 했건만, 막힘이 없었다. 하지만 영화 자체의 톤 앤 매너가 그렇듯 ‘방황하는 칼날’로 직접 들어가자 진지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미묘하지만 순간적으로 표정이 바뀌었다.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었을 것이다. 극중 상현(정재영)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사진 = 이수길 기자사진 = 이수길 기자

“정재영은 아들만 있지만 난 딸이 하나 있어요. 영화에선 상현을 막아야 하는 형사 역인데 사실 정말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든 장면도 있었고 화도 났죠. 세상에 금쪽같은 자기 딸내미가 그런 무참한 짓을 당한 뒤 죽었어요. 그 어떤 부모가 눈이 안 돌아가겠어요. 정말 상상조차 하기 싫지만 굳이 물어보시니, 만약 제가 상현과 같은 상황이라면(웃음 고개를 도리질치며). 어휴, 상현의 입장이 전 100% 이해가 됩니다.”

사실 이성민은 처음 자신이 맡은 형사 억관이 뒷북을 치는 캐릭터인 줄 알았단다. 처음 출연 제의를 받을 당시에는 드라마 ‘골든타임’을 찍고 있었다. 이정호 감독에게 전화를 받고 약속 장소에 나갔다. 그때는 시나리오조차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고. 이 감독의 전작 ‘베스트셀러’에 출연한 인연으로 만난 자리에서 출연 제의를 받았다. 그는 “이 감독이 ‘이런 얘기를 쓰고 있다’며 설명을 했고 관심이 생겼다”면서 “얘기 하고자하는 방향이 너무 명확했다. 주저할 이유가 없어서 시나리오도 없는 상태에서 결정했다”고 웃었다.

사진 = 이수길 기자사진 = 이수길 기자

“얘기를 들어보는 데 꽤 재미가 있더라구요. 이 감독이 얘기를 재미있게 했나(웃음). 그때는 이 정도로 힘들고 어두운 얘기는 아니었는데, 만약 그랬다면 안 했겠죠.(웃음) 농담이고, 내가 맡은 형사 분량도 꽤 있는 거에요. 속으로 ‘어우 괜찮은데’라며 좋아했죠. 근데 그때까지는 그냥 꽤 괜찮은 얘기, 그러니깐 딸을 죽인 범인을 쫓는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를 쫓는 형사 얘기 정도로만 알았죠. 그리고 형사는 항상 뒷북만 치고. 그런데 시나리오가 나오고 영화를 찍으면서 그 깊이가 달라지더라구요. 사건을 다루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랐죠.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져요. 상현의 정의와 억관의 정의, 과연 어떤 것이 진짜 정의인지를.”

묘한 지점이 바로 그 ‘정의’를 해석해야 하는 인물이 바로 부모란 이유 때문이다. ‘방황하는 칼날’이 단순히 청소년 범죄 문제 그리고 정의에 대한 해석을 내놓고만 있는 것도 아니다. 가해자의 가족도 등장하고 피해자의 가족도 등장한다. 이성민은 자신도 부모며, 정재영 역시 부모이기에 출연 배우이면서도 영화를 보는 내내 한숨을 내쉬었단다. 부모라면 한 순간에 내 자식이 가해자가 될 수도 있고, 또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단 사실을 영화는 주지시키고 있다.

사진 = 이수길 기자사진 = 이수길 기자

“글쎄요. 흠, 이 영화가 정의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다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해석하는 정의가 뭘까요. 사회 집권층은 결코 그렇지 못하잖아요. 유독 힘없는 서민들에게만 그 정의가 강요되고 있어요. ‘잘못하면 너도 이렇게 될 수 있다’고 모든 매스미디어가 강요하잖아요. 참 아이러니하죠. 그래서 영화도 사회적인 질문으로 확장시킬 수도 있지만 그냥 상현 개인의 복수에 코드를 맞췄잖아요. 반대로 생각하면 그게 더 훨씬 사회에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현실성이 있다고 보이니까요.”

참 어렵고 힘든 영화다. 얘기를 나누는 내내 이성민의 얼굴은 웃음과 진지함 그리고 어두움이 교차했다. 물론 그 모든 감정의 배경에는 앞서 설명한 연민이 전부 담겨 있다. 그런 인간적인 매력의 이성민도 ‘방황하는 칼날’을 찍으면서 딱 한 번 이성을 잃을 뻔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어린 친구와 촬영을 하는데 감독이 나 몰래 그 친구에게 디렉션을 준 거에요. 내 말을 건성건성으로 듣고 반응하라고. 내가 막 연기를 던지면 이 친구가 받아야 하는데 정말 불량한 학생처럼 앞에서 건들건들 거리는 거에요. 몇 번을 주고받다가 순간적으로 억관이 나올 뻔 했죠. 정말 손이 거의 반쯤 올라갔다니까요.(웃음) 그 어린 친구 정말 연기 잘했죠.”

사진 = 이수길 기자사진 = 이수길 기자

아쉽게도 이 장면은 영화에서 편집됐다. 억관의 감정이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힌트를 주기 때문이라고. 진짜 촬영에 애를 먹었던 장면은 따로 있단다. 상현과 억관의 통화 장면이었다. 이성민은 “대체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면서 “딸을 그렇게 끔찍한 사건으로 잃은 아빠와 어떻게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더라”며 말하는 순간에도 고통이 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성민은 단호한 감이 들었다. 얘기를 하는 내내 어투에서 맺고 끊음이 분명했다. 일종의 룰을 중시하는 모습이었다. ‘방황하는 칼날’ 속 억관의 혼란스러운 심정이 실제 이성민과도 아주 잘 매치가 되는 모습이었다.

사진 = 이수길 기자사진 = 이수길 기자

“난 룰이 지켜지는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당연하잖아요. 사실 제가 ‘1박2일’의 광팬이었어요. 본방 사수는 물론 못 보면 유료 다운을 받아서도 보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안 봅니다. 왜요? 출연진이 어떤 룰을 깨고 제작진과 딜을 하는 거에요. 이게 예능 프로그램이니깐 괜찮다는 분도 있고,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냐 그러는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큰 청소년들이 결국 원칙이란 건 깨도 그만이란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뭔지 아세요. ‘안 되면 되게 하라’입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인터뷰 말미에 이성민은 ‘방황하는 칼날’이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선생님과 함께 청소년들이 보고 토론을 하는 그런 좋은 소재가 될 수도 있을 텐데”라며 아쉬움을 연신 드러냈다.

현재 이성민은 ‘군도:민란의 시대’ 개봉을 앞두고 있고, 영화 ‘빅매치’ 그리고 ‘손님’에 연달아 캐스팅 됐다. 27년 전 무명 연극배우에서 충무로 최고의 스타로 변신한 그다. 그에게 ‘연민’이 담긴 얼굴이라고 전했다. 이성민은 “너무 고맙다. 참 듣기 좋은 말이다. 그래서 내가 악역이 안 되나”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사진 = 이수길 기자사진 = 이수길 기자

이제 배우 이성민이 연기를 하면 어떤 역할이든 진짜가 된다. 그래서 ‘방황하는 칼날’ 속 억관의 마지막 대사가 더욱 강렬하게 들려온다. “약속했잖아. 지켜봐야지.”

이성민, 아니 ‘방황하는 칼날’ 속 형사 장억관이 굳게 다문 입술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김재범 기자 cine517@

뉴스웨이 김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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