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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원 지폐로 글로벌 1위 조선기업 기적"

50돌 맞은 현대重①

"500원 지폐로 글로벌 1위 조선기업 기적"

등록 2022.03.21 08:25

이승연

  기자

故 정주영 명예회장, 대한민국 산업史 전설로 꼽혀미포만 사진과 지도, 유조선 설계도로 기적 일궈英 투자은행에 4300만달러 차관 부탁, 끝내 거절왕 회장, 불굴의 정신 콧대 높은 英투자자 굴복시켜불과 2년 3개월 만에 조선소와 배 2척을 동시 건조현대중공업그룹 명실상부 세계 최대 중공업사로 성장

1972년 현대조선 기공식. 사진=아산 정주영 홈페이지 캡처1972년 현대조선 기공식. 사진=아산 정주영 홈페이지 캡처

1972년 3월 23일, 울산 미포만 백사장. 이때만 해도 이곳이 미래 K-조선의 성지가 될 거라곤 아무도 예상 못했다. 글로벌 1위 조선사 현대중공업(당시 현대조선)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됐다.

황량하기 짝이 없는 이 허허벌판에서 '왕 회장' 정주영 명예 회장은 조선업 출사표를 던졌다. 각국 대사와 시민 50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정 회장은 "초대형 조선소와 2척의 유조선을 최단기 내 최소 비용으로 짓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말을 믿는 이는 많지 않았다. 앞서 고속도로 건설과 자동차 개발에서 얻은 정 회장의 무모한 자신감 정도로 치부했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현대가 조선사업을 성공하면 내 손가락에 불을 켜고 하늘에 올라가겠다"고 조롱했다. 외국 조선사들도 "현대차가 목선이나 만들면 다행"이라고 비아냥댔다.

그럴 만도 했다. 당시 국내 조선업 수준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기술력으로 만든 가장 큰 배는 1만700톤(t)급에 불과했고, 건조 능력도 고작 19만톤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정 회장에게 기가 막힌 묘수(妙手)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가 가진 무기라곤 오직 '미포만 해변' 사진과 '지도', 유조선 '설계도'가 전부였다.

외국 기업들과의 합작은 꿈도 못 꿨다. 당시 정 회장은 일본 조선사들과 합작을 시도했으나 기술력도 인력도 심지어 돈도 없는 한국의 조선사와 손을 잡으려는 일본 기업은 없었다. 계속되는 그들의 무시와 견제에 결국 정 회장은 외국에 나가 돈부터 빌려 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곤 우리 기술로 배를 만들어 내겠다고 다짐했다.

1960년 대 말 울산 조선소 모습. 사진=아산 정주영 홈페이지 캡처1960년 대 말 울산 조선소 모습. 사진=아산 정주영 홈페이지 캡처

조선소 건설에는 약 8000만 달러의 자금이 필요했다. 돈이 없었던 정 회장은 차관과 기술력을 얻기 위해 미국,영국 등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녹록치 않았다. 가진 거라곤 정부가 내어준 땅 밖에 없는데 콧대 높은 외국 투자자들이 선뜻 돈을 내줄 리가 만무했다. 실제로 정 회장은 영국 투자은행인 바클레이스 은행에 4300만달러(한화 208억원)규모의 차관을 부탁했지만, 끝내 거절당했다.

이후 수소문 끝에 영국 투자자들을 쥐락펴락한다는 선박 컨설팅 회사 애플도어 롱바텀 회장을 찾아가 차관을 받기 위한 추천서를 부탁했다. 그러나 그 역시 거절했다. 선주도 없고, 상환 능력도, 잠재력도 없어 보이는 현대조선을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거북선이 새겨진 500원 화폐. 사진=아산 정주영 홈페이지 캡처거북선이 새겨진 500원 화폐. 사진=아산 정주영 홈페이지 캡처

바로 그때 정 회장은 바지 주머니에서 거북선이 새겨진 500원 짜리 한국 지폐를 꺼내 보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배를 보시오. 이것이 거북선이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앞선 1500년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어 일본을 혼낸 민족이오. 역사의 한 과정에서 산업화가 늦어졌을 뿐 우리 민족은 엄청난 잠재력과 역량을 가지고 있소."

그의 진정성 있는 호소에 롱바텀 회장은 감동을 받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현대조선이 차관을 받을 수 있는 추천서를 써줬다.

영국 버클레이즈 은행과 차관도입 서명을 하는 정주영 명예 회장. 사진=아산 정주영 홈페이지 캡처영국 버클레이즈 은행과 차관도입 서명을 하는 정주영 명예 회장. 사진=아산 정주영 홈페이지 캡처

물론 차관을 손에 쥐기까지 숱한 역경은 더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발휘된 정 회장의 불굴의 정신은 콧대 높은 영국 투자자들을 연이어 굴복시켰다. 결국 바클레이스 은행과 영국 수출신용보증국은 지구 반대편에서 건너 온 낯선 동양인에게 8000만 달러의 차관을 과감히 내줬다.

이 뿐만이 아니다. 정 회장은 한국에 차관을 빌리면서 만나게 된 그리스 거물 해운업자 리바노스 회장으로부터 26만톤(t)급의 배 2척을 수주 받았다. 당장 배를 지은 조선소도 없는 데 말이다. 선박 가격은 척당 303만달러로, 5년 후에 배를 인도하는 조건이었다. 500원짜리 지폐 한 장으로 일군 성과라고 보기엔 믿기지 않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1974년 6월, 7301호, 7302호 명명식. 사진=아산 정주영 홈페이지 캡처1974년 6월, 7301호, 7302호 명명식. 사진=아산 정주영 홈페이지 캡처

믿을 수 없는 일은 더 있었다. 정 회장이 불과 2년 3개월 만에 조선소와 배 2척을 동시에 만들어 낸 것이다. 한국 조선사는 물론이고, 전 세계 조선사에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그 황량한 백사장에 서서 "대형 조선소와 2척의 유조선을 짓겠다"던 그의 터무니없던 약속이 정확히 2년 3개월 만인 1974년 6월28일 울산중공업 준공식과 1·2호식 명명식으로 현실이 된 것이다. 그해 현대중공업의 매출은 588억3985만원을 기록했다. 총자산도 1343억6000만원에 달했다.

조선소가 완공된 후에는 전 세계로부터 일감이 몰려 들었다. 짧은 시간 안에 질 좋은 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조선사라는 소문이 지구 반대표까지 자자했다. 경쟁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선가 역시 주효했다. 유조선 호황에 전 세계로부터 발주가 이어졌고, 그 중 상당 부분은 현대중공업의 몫이 됐다. 완공 첫 해만 51만8000톤의 수주가 이뤄졌고, 이듬해에는 194만톤(t)까지 불어났다. 그해 터진 오일쇼크도 현대중공업에게는 남의 일이었다.

자신감을 얻은 정 회장은 이후 유조선을 넘어 다목적 화물선, 벌크선, 목재운반선 등으로 생산 선박을 다양화시켰다. 1975년에는 수리 조선소인 현대미포조선도 세웠고, 1976년에는 선박용 엔진 사업에도 진출했다. 1982년, 현대중공업은 건조량 기준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의 조선사에 이름을 올렸다. 황량하기 짝이 없었던 백사장에서 세계 1위의 조선사에 오르는 데 걸린 시간은 딱 10년이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대중공업은 세계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대중공업 울산 조선소 전경. 사진=현대중공업 홈페이지 캡처현대중공업 울산 조선소 전경. 사진=현대중공업 홈페이지 캡처

물론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중국 조선사들의 저가 공세 등은 현대중공업은 물론 한국 조선사의 뿌리를 흔들어댔다. 그러나 위기 때마다 저력을 발휘했던 기술력은 현대중공업이 왜 글로벌 톱 티어인지를 매번 입증시켰다.

정 회장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불굴의 개척 DNA를 물려받은 현대중공업은 계속해서 한국 조선사의 신화를 써내려갔다. 2002년 3월 세계 최초로 선박 인도 1000척의 기록을 세운 데 이어 2012년에는 선박 인도 1억GT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또한 2015년에는 선박 2000척 건조라는 신기록을 세우며 글로벌 조선 업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

왕자의 난을 겪으며 현대그룹에서 분리됐지만, 현대중공업그룹은 명실상부 세계 최대 중공업사로 성장했다. 이제는 조선 뿐만 아니라 해양, 플랜트, 엔진기계, 전기전자, 건설장비, 그린에너지, 그리고 정유·석유화학, 무역, 금융, 자원개발 등 30여개 계열사를 거느리는 총 자산 80조원 규모의 종합중공업그룹의 위용을 갖추게 됐다.

뉴스웨이 이승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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