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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박승직

[창업주에게 배우는 인사이트 리더십]두산 박승직

등록 2018.01.24 07:07

최홍기

  기자

‘손님은 왕이다’ 정신 그룹이념 토대‘박가분’이라는 이색 화장품으로 기반 회계처리 근대방식 도입 경영혁신 단행

박승직-박두병-박용곤 3대부자의 모습. 사진=두산그룹 제공박승직-박두병-박용곤 3대부자의 모습. 사진=두산그룹 제공

“상인은 정치에 관여해서는 그 본래의 뜻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손님이 뺨을 때리거든 그 손을 붙잡으며 ‘손님, 손이 얼마나 아프십니까’라고 말하라.”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의 조부인 두산그룹 창업주 매헌 박승직은 1864년(고종 1년) 6월22일, 경기도 광주군 탄벌리에서 밀양박씨 부마공파 문회(文會)와 모(母) 김해김씨 사이에서 8남매 중 넷째, 다섯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자는 사선, 아호는 매헌이다.

매헌은 33세가 되던 해인 1896년 8월1일, 종로 4가 15번지에 박승직 상점을 열었다. 당시 박승직이 종로 중심가에 상점을 자리잡지 않고 배오개에 점포를 개설한 것은 미래지향적이고 진취적인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면포를 주로 취급하는 박승직 상점엔 ‘박가분’이라는 이색 제품이 있었다. 박가분은 1915년 4월부터 매헌의 부인 정정숙 씨가 사업 내조의 일환으로 수공으로 제조한 화장품이다. 처음엔 면포 상품 고객에게 사은품으로 제공했으나 반응이 좋아 상품으로 본격 시판했다. 박가분 제조본포는 1918년 8월 특허국으로부터 상표등록증을 교부 받았다.

매헌은 ‘배오개 거상’이라는 별칭이 생겼을 정도로 성공을 거둬 한인상계의 발전적 본보기가 된다. 1925년에는 ‘주식회사 박승직 상점’으로 개편해 매헌이 사장이 됐다. 매헌은 1933년 12월 소화기린맥주주주식회사의 주주가 된다. 대주주는 일본 기린맥주로, 6만 주 가운데 5만 7800주를 차지했고, 유화정책으로 매헌과 김연수 등 2명의 조선인 주주를 참여하게 해, 두 사람은 각각 200주씩 갖고 취체역(이사)이 됐다.

1929년에는 경기 불황 여파로 박승직 상점 역시 어려움에 처했고, 1930년엔 큰 적자를 보면서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다. 박승직 사장은 경영 회복을 위해 점포를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1931년에는 감각상각비의 계상과 대손처리 실시 및 금전등록기를 설치하는 등 회계처리 방식의 근대화를 꾀했다. 또한 수입면직물뿐만 아니라 인조견 등 국내 직물류까지 판매하면서 사업 다각화와 더불어 경영의 일대혁신을 단행했다.

그러다 1941년 박승직 상점은 직물 판매가 침체 늪에 빠지자 경영 정상화 일환으로 매헌이 주주로 참여하고 있던 소화기린맥주 대리점을 개설해 위탁판매업을 시작했다. 이때는 맥주도 직물과 마찬가지로 배급제였다. 박승직 상점은 소화기린맥주로부터 주 2회 맥주를 공급을 받아 2~3일 이내에 접객업소나 맥주도매상으로 출고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매헌의 장자인 박두병이 소화기린맥주의 지배인이 됐으며, 이후 동양맥주로 발전시켰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박승직은 휴업 중이던 박승직 상점을 두산상회로 재개업해 두산의 여명기를 열고, 1950년 6.25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12월 20일에 86세로 타계했다.

뉴스웨이 최홍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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